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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기사 Apr 02. 2016

가장 큰 공포는  내가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전투의 심리학

사람들이 알고 있는 전투에 관한 지식의 대부분은 헛소리를 2미터 높이로 쌓은 것이다. (40페이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군 용사의 50퍼센트는 바지에 오줌을 쌌고 약 25퍼센트는 똥을 쌌다고 인정했다. (43페이지)

(죽음의 공포 앞에서 방광과 괄약근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보았던 피 튀기는 전쟁영화, 처참한 총격전이 벌어지는 범죄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의 바짓가랑이 사이에 똥이나 오줌 같은 것이 묻어 있는 것은 도무지 본 적이 없다.)


현실에서 전투에 철저하게 전념하는 군인은 소수에 불과하다.

(공포 때문에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소총병의 85퍼센트가 총을 쏘지 않았다. (219~220페이지)

<1인의 전쟁> 찰스켈리 지음 : 메를리라는 군인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하룻밤 사이에 혼자서 1,500명의 독일군을 막아냈다. 그러는 동안 다른 군인들은 공포에 떨고 있었다.


살면서 겪었던 공포의 순간들을 추억해봤다.


어린이대공원에서 청룡열차를 탔다. 뭘 몰랐었다. 점심 먹은 걸 다 쏟아냈다. 고소 공포의 시작이었다.

행주산성 근처 야산에서 밤 따다가 누구인지 모르는 어떤 아저씨에게 걸려서 무릎 꿇고 손 들고 꿀밤까지 맞았다. 공포에 치욕까지.

고등학생 때 팔당댐에 놀러갔다가 객기 부리느라 물에 뛰어들었는데 아무리 내려가도 강바닥에 발이 닿질 않았다. 흙탕물 잔뜩 먹고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어떤 승객의 발이 전철과 승강장 사이에 빠졌다. 허겁지겁 발을 뺐지만 신발은 벗겨져서 철로에 떨어졌다. 죽음의 공포 때문에 몸의 모든 근육이 움츠러들었을 것이다. 그 광경을 목격한 이후 나도 전철을 탈 때마다 주먹을 불끈 쥐게 된다.

전에 살던 집에서는 샤워 중에 다른 가족이 주방에서 수도를 틀면 샤워기에서 갑자기 찬물이 확 나왔다. 소스라친다는 게 그런 것이다. 샤워를 꺼리는 원인이다.

결혼식날 신랑신부 행진 직전에 하객 중에서 옛 애인의 모습을 본 것 같았다. 많은 하객들 사이로 유령 같은 옛 애인의 실루엣이 스쳐 지나갔다.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공포를 모르면 무모하게 뛰어들다가 망할 수 있다.

그래서 공포는 적당한 긴장의 근원이다.


하지만 그 긴장도 무색할 만큼 큰 공포가 가끔 나를 엄습할 때가 있는데 그건 내가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퇴근 후 동창들을 만나서 떡볶이를 먹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선선한 바람이 옷깃을 흔드는 바람에 맥주 한 잔씩만 더 하기로 하고 조명이 은은한 카페에 들어갔다.

거기서 끝냈어야 했는데 안주로 나온 망고 슬라이스가 너무 달콤해서 커피점에서 휘핑크림 잔뜩 올려진 모카 한 잔씩 음미하기로 했다.

따뜻했던 모카가 다 식고 난 후 길 건너 공원의 벤치에 앉았는데 옆 가게에서 솔솔 흘러나오는 홍합탕 냄새가 그윽하여 그리로 들어갔다.

그 때가 열두 시 삼십 분이었다.


눈이 번쩍 떠졌다.

'이런, 지각이닷.'

허겁지겁 세수하고 대충 로션과 립스틱만 바르고 뛰쳐나가느라 속 쓰린 걸 느낄 겨를이 없었다.

여덟 시 오 분.

굴러떨어질 기세로 전철역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빈 자리가 보였다.

출퇴근 중 전철에서만 보는 나만의 드라마가 있다.

어차피 지각이니 쿨하게 시청했다.


전철문이 열림과 동시에 회사까지 아이언맨처럼 날아갔다.

여덟 시 오십 분.

이십 분 정도 지각은 분명히 용서받을 거라 생각했다.


사무실에 들어섰다.

아무도 없었다.

5초 정도를 가만히 서서 생각해보았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집중하면서 다시 생각해보았다.

회의 중인가?

∙∙∙.


아!

한글날이라니.  

세종대왕과, 한글날을 공휴일로 제정한 대한민국 정부에 본의 아니게 감사했다.


가장 큰 공포는 내가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건 마치 핸드폰을 손에 들고 핸드폰을 찾아 헤매는 황당함과, 쇼핑몰의 지하 5층짜리 주차장에서 어느 층 어느 구역에 주차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 암담함 같은 것이다.

냉장고에 넣은 리모콘을 찾지 못해 텔레비젼을 굶는 좌절감도 공포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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