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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기사 Mar 18. 2016

나 자신만이라도 변한다면 본전은 하는 거다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단언할 수 있다.


AK백화점 앞에서 K스포츠가 이벤트를 하고 있었다.

현재의 체중을 재고 7일 후에 다시 체중을 쟀을 때 5kg 이상 빠져 있으면 운동화를 주기로 하는 행사였다.

미끼 상품 올려놓고 다른 상품들 판매하려는 전략인 게 너무나 눈에 보였지만, 뭐 상관 없었다.


샘플로 전시된 운동화는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환상적인 디자인이었다.

형광빛이 은은하게 깔려 있고 주황색 라인이 유려하게 뻗어 있는 운동화의 가격은 30만원이었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298,000원이라고 되어 있지만 캔커피 2개를 얹어주기 때문에 30만원이라는 것이다.


밑져봐야 본전 아냐?

난 나 자신을 변화시키기로 결심했다.

"오늘 이벤트 몇 시까지 해요?"

"6시까지 할 거니까 2시간 정도 남았네요."

시간은 충분했다.

 

친구는, 운동화에는 관심 없지만 떡볶이에는 관심 있다며 여자 둘이서 3인분을 주문했다.

물도 3컵 마셨다.


신상명세를 적고 체중계 위에 올라갔다.

"손님, 신발은 벗고 올라가셔야죠."

앗! 욕심이 지나쳤다.

"54.2kg입니다. 7일 후에 49.2kg 이하가 되시면 저 운동화를 공짜로 드리겠습니다. 화이팅!"

마이크까지 들고서 숙녀의 체중을 그렇게 크게 외치다니.

몸무게가 적들에게 노출된 것은 30년 인생 가장 치욕적인 것이었지만 운동화를 공짜로 얻을 수 있다는 희망과, 비록 턱걸이지만 40kg대로 진입할 수 있다는 희망 앞에 나를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평소 52kg 정도였으니 떡볶이와 물을 2kg 이상 먹었던 거다.

난 나 자신을 칭찬해주기로 결심했다.


살인적인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아침과 저녁은 무조건 고구마만 먹었다.

그 잘 빠진 운동화 사진으로 바뀐 바탕화면을 보면서 참고 또 참았다.

51kg에서 더 내려가지 않았다.

한 번도 51kg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었다.

먹는 게 적으니 힘이 없어 움직임도 적어지게 되고, 그러다보니 '최저 체중 유지의 법칙'에 딱 걸린 거다.


7일 후.

아침부터 비가 왔다.

이벤트가 취소되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비가 오는 날 야외에서 이벤트를 할 리가 없을 거라고 단정했다.


난 나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떡볶이와 운동화가 눈 앞에서 왔다갔다 했다.

배고파서 헛것이 보이는 거라고 생각했다.

비 그치면 떡볶이나 먹으러 가자고 친구에게 전화했다.


6개월이 지난 지금 내 체중은 54kg이다.

난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사실 가끔 변하긴 하지만 그건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인 경우가 더 많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유럽을 지배하면서 스페인 마드리드에 궁정이 있을 당시 벨라스케스라는 화가가 그린 <시녀들>이라는 그림이다.

피카소를 비롯한 여러 화가들이 모작을 그릴 만큼 미술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가치가 있는 그림이다.


이 그림으로부터 시작되어 이 그림으로 마무리되는, 메타픽션(metafiction : 허구임을 알려주는 허구)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은 소설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이 소설의 속을 잘 곱씹어보면 <시녀들>이라는 그림이 보인다.

그리고 그 그림 안에 내 모습이 있는 것도 보일 것이다.

곱사등이었고 난쟁이었던 바르톨로메는 이 그림 오른쪽 아래에 있는 개의 모습으로 그려질 뻔했다.

우스꽝스러운 개의 분장을 한 채.

하지만 공주의 장난감 개 역할에서 빠지는 대신 이 그림에서도 빠지기로 한 것이다.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비굴한 변명일지 모르지만, 일단 주위 환경부터 웬만해서는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 자신의 용기가 부족하다.  


공주님께서는 너를 인간개로 원하셔. 네가 누구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상관없어. 건방지게 굴지 마. 네가 글을 안다고 누구 하나 관심을 가져줄지 아니? 괜히 미움만 사기 십상이지. (201페이지)


네 것이 되지 않을 것을 위해 하루 종일 일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니? (273페이지)


과거는 변하지 않는다.

운명도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나 자신만이라도 변한다면 본전은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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