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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기사 Apr 26. 2017

나의 투쟁

위치와 권력의 민감한 상관성

엘리베이터가 있다고 하자.

엘리베이터에 탄다.

타자마자 뒤돌아서 엘리베이터의 문 쪽을 바라보고 선다.

엘리베이터에서는 모두 문 쪽을 바라보고 선다.

이 원칙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혹시 문을 등지고 서는 게 습관이어서 어떤 사람이 내 앞에서 나와 마주보고 선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문이 있는 쪽 벽을 상변(upside), 안쪽 벽을 하변(downside)이라고 하자.

그러면 네 개의 구석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좌상귀(left up), 우상귀(right up), 좌하귀(left down), 우하귀(right down).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는데 이미 타고 있던 사람(선승자)이 한 명 있다.

나중에 탄 사람(후승자)은 자신이 어느 위치에 서야 하는가에 대한 두 가지 원칙을 알고 있다.

선승자의 성별, 나이, 얼굴 생김새와 표정, 그리고 체취를 파악한 후 그 데이터를 분석하여 선승자의 삶의 이력을 유추한 다음 선승자의 심신 상태와 취향, 그리고 가치관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위치를 정한다.

이 모든 과정에 걸리는 시간은 투수가 던진 공이 포수의 글러브에 도달하는 시간의 절반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원칙 1 : 후승자는 선승자가 선 곳의 대각선 위치에 선다. 선승자로부터 가장 먼 곳을 선택한다. 

만약 선승자가 우상귀에 서 있다면 후승자는 좌하귀로 간다.

선승자가 좌상귀에 서 있다면 후승자는 우하귀로 간다.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없다.


원칙 2 : 선승자에게 등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원칙은 기득권 밀려 새로운 원칙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선승자가 우하귀나 좌하귀에 서 있으면 그 대각선 방향인 좌상귀나 우상귀로 가는 건 선승자에게 등을 보이게 되어 좀 꺼려지지만, 선승자의 기득권에 눌려 어쩔 수 없이 대각선 상귀에 선다.

게 싫어서 선승자와 동일한 선, 즉 선승자가 우(좌)하귀일 때 후승자가 좌(우)하귀에 나란히 서는 것은 선승자가 선점하고 있는 기득권에 도전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이것 또한 마뜩치 않다.


이런 식으로 발생된 외가, 원칙을 밀어내는 새로운 원칙이 된다.

좌(우)하귀에 있는 선승자가 남성이고 후승자가 여성일 때 후승자는 (비록 선승자에게 등을 보이긴 하지만) 차라리 대각선 우(좌)상귀를 선택한다. 선승자인 남성에게 도전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아서이다.

우(좌)하귀에 있는 선승자가 여성이고 후승자가 남성일 때 후승자는 (비록 선승자에게 등을 보이긴 하지만) 역시 대각선 좌(우)상귀를 선택한다. 선승자인 여성을 공격하려는 듯한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아서이다.


우리 회사가 있는 빌딩은 36층이다. 지하 1층부터 지상 2층까지는 쇼핑몰이다.

지하 주차장 전용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고 그 외에 18개의 엘리베이터가 있다.

이 중 6개는 지하 1층부터 지상 12층까지 운행,

다른 6개는 지하 1층부터 지상 2층, 그리고 12층부터 24층까지 운행,

또 다른 6개는지하 1층부터 지상 2층, 그리고 24층부터 36층까지 운행한다.


우리 회사는 36층에 있다.

그 날은 평소보다 좀 일찍 회사에 도착했다. 8시.

전철역에서 연결되는 빌딩의 지하 1층에엘리베이터를 탔다.

우상귀에 섰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나뿐이었다.

문이 거의 닫히다가 다시 열렸다.

어떤 남자가 탔다.

우상귀에 있는 나를 힐끗 쳐다본 후 내 앞에 있는 닫힘 버튼을 일부러 누르더니 우하귀로 가서 섰다.

앗! 원칙이 파괴되었다.

선승자가 우상귀에 서 있을 경우, 그것도 선승자가 나 같은 여성일 경우 남성인 후승자는 대각선인 좌하귀로 가야 하는데, 그는 대한민국 전역에 떠돌고 있는 '엘리베이터 위치 선정의 원칙'을 보란 듯이 무시하고 나의 등 뒤에 선 것이다.


원칙 파괴자의 호흡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고 그의 날숨이 내 머리카락을 건드리는 것 같았다.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했다.

'내가 슬쩍 좌상귀로 옮기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것 같다.'

왼쪽 발을 좌상귀 쪽으로 막 떼려는 순간 1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구두닦이 아저씨가 구두걸이를 밀면서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그 아저씨는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만나곤 한다. 머리에 머리카락이 전혀 없이 깨끗하고 왁스 같은 걸 발라서 반짝거린다.

구두도 자신의 머리처럼 반짝거리게 해줄 수 있다는 자신감과 숨길 게 없이 깨끗하다는, 클라이언트를 향한 신뢰감을 그의 눈부신 머리는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구두닦이 아저씨는 정수리에서 흘러내리는 광채를 머플러처럼 휘날리며 2층에서 내려버렸다.


엘리베이터에는 다시 그 원칙 파괴자와 나뿐. 위치도 역시 나는 우상귀, 그는 우하귀였다.

이제 엘리베이터에 다른 사람이 타려면 최소한 24층까지는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내 경험상 그 시간에 24층부터 36층 사이에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좌상귀로 자리를 옮기는 것은 타이밍을 놓친 것 같았다.

자칫 내가 그를 몹시 경계하고 있다는 인상을 줘서 그의 야수 본능을 깨울 수 있는 민감한 행동이기에.

침착한 척 하려고 핸드백을 열어 핸드폰을 꺼내면서 왼쪽 아래를 쳐다보았는데, OMG! 빨간 운동화였다.

언젠가 버스에서 어떤 남자가 여자를 마구 때린 적이 있었다.

버스 기사가 조용히 하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여자를 때리던 남자는 버스가 서자 여자를 끌고 내리더니 길에서도 여전히 여자를 때렸다.

창문 밖으로 그 상황을 지켜보았는데, 그 남자가 신었던 운동화가 빨간 운동화였다.


그러고 보니 빨간 운동화는 가려는 층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36층을 가려는 건가.

36층엔 우리 회사뿐인데 전혀 젠틀해 보이지 않는 빨간 운동화가 아침 8시에 네트워킹 소프트웨어 회사에 무슨 볼 일이 있어서.


36층이나 되는 높은 곳에 있는 회사에 성실하게 다닌 지난 4년 세월의 주요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빨간 운동화가 살짝 움직이는 게 반투명이긴 하지만 벽에 반사되어 보였다.

빨간 운동화가 내 목에 헤드락을 거는 것 같았다.

몸 속의 호르몬들이 모두 몸의 윗부분으로 모이는 것 같았다.

벽에 얼굴을 비쳐보았다.

윽! 바싹 마른 내 빨간 입술이 저돌적으로 도드라져보였다.

괜히 핸드폰을 켰다.

핸드폰을 쥔 손이 축축해졌다.

심장에 모인 피가 빠져나가지 않는 것 같았다.

이 선들선들했다.   


팅!

36층에 엘리베이터가 섰다.

문이 열리면 총알처럼 튀어나가려고 기다리다가 입 안에 고였던 침이 기도로 넘어갔다.

기침을 참으려고 고개를 숙였는데 마침내 문이 열렸다.

녹색 운동화가 눈에 확 들어왔다.


"어머! 지혜씨, 오늘은 일찍 출근하네. 책상에 녹즙 갖다 놨어요."

녹즙 배달 아주머니였다.

"네, 퀙퀙, 운동화가, 켁켁, 예쁘네요. 헥헥."


엘리베이터에서 위치 선정이 가장 중요하다.

엄밀히 말하면 법도 원칙도 관습도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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