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건네는 질문 13.
태릉선수촌 스케이트장에 갔어. 이번에 네 두 번째 스케이트 강습이었지.
그동안 너는 언니가 스케이트 타는 모습을 멀리서 멀뚱히 바라만 봤는데, 어느새 일곱살이 돼서 직접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된 거야.
그 작은 몸으로 2시간 내내 얼음판 위에서 간신히 중심을 잡으며 진지한 얼굴로 수업에 임하고 있는 네 모습을 보며 너도 많이 컸구나 싶었어. 조만간 너 역시 언니처럼 나보다 훨씬 스케이트를 잘 타게 되겠지. 지금의 어설픈 첫 걸음이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말이야.
요즘 부쩍 네가 컸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남들은 미운 일곱 살이라지만, 내 눈엔 네가 빠르게 자라는 게 너무 아쉬울 정도로 마냥 귀여울 뿐이야.
네가 컸다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들 땐 네 살이나 많은 언니를 어떻게든 이겨먹으려는 네 모습을 볼 때야. 말싸움으로 이길 수 없는 게 뻔한데 먼저 말싸움을 걸고, 말로 안 되면 큰 목소리와 울음 섞인 협박, 마지막엔 "엄마한테 이를 거야!"로 언니의 자포자기를 이끌어내지.
너만의 싸움의 기술, 우기기엔 장사 없다는 걸 영리한 넌 이미 터득한 거야.
그런데 세상엔 우기기 싸움의 기술이 먹히지 않는 곳도 있어. 바로 법정이야.
얼마 전 법정에서 피고인으로 선 한 장애인의 이야기를 기사로 썼어. 사회적 연령 7세, 자기관리행동·사회화행동 수준은 3~4세의 지적장애인이었지.
지적장애인이라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웠던 그는 '고수익 아르바이트'라는 인터넷 광고에 속아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에 이용당했어. 이미 속옷까지 벗은 사진을 조직에 넘긴 상태였고, 이것으로 협박을 당해 어쩔 수 없이 범죄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지. 법정은 그에게 징역 8개월을 선고했다.
문제는 그의 말을 대신 전달해줄 사람이 없었다는 거야.
성폭력 피해 아동이나 장애인에게는 그들의 말을 대신 전달하는 '진술조력인' 제도가 우리나라에 있지만, 장애인이 피고인으로 법정에 서는 순간 그 장치는 사라진다. 장애인이 범죄 피해자가 될 때는 보호 대상이지만, 가담자로 넘어가는 순간 법의 잣대 앞에 홀로 서야 한다.
그에게 변호사가 있더라도 변호사 역시 진술조력인과 같이 장애인이나 아동 등과 소통할 수 있는 전문가가 아니라,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가능성은 낮을 수밖에 없다.
한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이렇게 말했어.
"변호사가 도우려 해도 소통이 안 됩니다. 결국 전체 맥락과 세부 상황이 전달되지 못한 채 재판이 진행되죠. 이때 필요한 건 번역자입니다. 장애인의 언어가 재판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죠."
너는 언니와 싸우다 조금만 억울해도 엄마에게 달려오잖아. 그런 널 보고 난 어쩔 수 없이 언니에게 조금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그건 언니와 내가 말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용인하는 너에 대한 일종의 배려다. 넌 언니보단 아직 덜 큰 약한 존재니까.
세상에는 우리와 성장 속도가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간다. 너무 일찍 성장이 멈춰버린 사람도 있고, 신체 일부가 불편한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이들을 장애인이라고 부르지. 이들을 위한 배려는 우리에게는 작은 불편일 수 있지만 그들에게는 삶의 지속을 좌우하는 문제일 수 있어.
그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선 우린 어떤 노력을 해야할까. 언니와 싸우다 억울하다며 나에게 달려오는 네 모습을 보면서 문득 너와 사회적 연령이 같은 그 지적장애인은 자신의 말을 제대로 전달할 최소한의 장치조차 없는 그 외딴 법정에 서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문득 궁금해 졌어.
헌법 제11조 제1항.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짧지만, 참 어려운 문장이다. 그날 그 법정의 한 자리에서는 그 문장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법정에서 오롯이 혼자일 수밖에 없었던 한 지적장애인은 자신의 말을 들을 준비조차 돼 있지 않은 법정에서 끝내 평등하지 못한 죗값을 감당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