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화창한 오후에 망원시장 입구를 끼는 골목을 걷다 보면 반려견과 산책을 나온 사람들을 자주 본다. 작은 강아지들이 복슬복슬한 꼬리를 흔들며 옴팡지게 걸어다니는 모습은 너무도 사랑스럽다. 망원동 주민들이나 젊은 연인들이 그런 반려견들의 존재를 보며 행복을 느끼는 모습은 이곳의 특별한 풍경이 된다. 흥미로운 점은 유모차에 탄 반려견들이 최근들어 많아졌다는 것이다. 젊은 부부뿐만 아니라, 노년의 할아버지, 혹은 결혼하지 않은 중년의 남성들도 유모차를 끌고 산책하는 모습이 종종 보인다. 하지만 반대로, 젊은 부부가 끄는 유모차에 작은 아이가 탄 모습을 본 기억은 드물다. 이제는 점점 사라져가는 풍경이 되어버린 것 같다.
주변 친구들의 SNS에서는 조카 사진을 올리는 모습을 자주 본다. 결혼과 출산이 점점 어려워지는 현실 속에서 도시에서 마주하는 어린아이는 점차 희귀한 존재가 되어간다. 그들의 순수한 웃음과 작고 여린 몸짓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무한한 사랑과 생명력을 불어넣어주지만, 그런 장면을 마주할 기회가 점점 줄어든다.
나는 이 도시에서 강력한 생명의 에너지를 가능한 오래 마주하고 싶다. 반려견과 반려동물, 혹은 반려식물에 애정을 쏟는 것은 분명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생명과 성장, 그리고 책임을 동반한 관계를 점점 더 멀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이가 유모차에 앉아 알 수 없는 사탕을 손에 쥔 채 하늘과 사람들을 바라보는 그런 단순한 풍경이 그리워진다.
2.
이러다 반려식물을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하며 햇빛을 쬐어주는 사람들이 생길지도 모른다. 식물에게 햇빛을 쬐어주고, 그것을 보며 행복을 느끼는 모습은 어쩌면 현 시대의 자연스러운 연장선이다. 또한 식물을 키우는 나의 입장에서도, 그것이 크게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식물도 동물처럼 인간의 정서적 안정과 위로의 대상이 되기에. 생명을 키우는 데에도 작은 책임감을 배우고, 자연물의 다소 정적인 미감을 학습하기에.
그러나 '반려돌'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무생물인 돌을 키우는 것이다. 토테미즘이나 애니미즘과 같은 고대 신앙 체계에 의존하는 원시인이 아닌 이상, 반려돌을 키우는 그는 아마도 감각적으로 깊은 공허를 느끼는 사람, 혹은 상상력이 비정상적으로 풍부한 사람일 것이다. 얼마나 생물에게 상처를 받았길래, 살아 움직이는 생명 대신 무생물인 돌에게까지 사랑을 부여하는 건가?
3.
이제는 복잡한 관계 대신, 손쉬운 관계를 선택하고 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권리의 보편적 보장을 내세우지만, 그 과정에서 과도한 책임과 불안을 개인에게 부과했다. 교육, 통제, 규제 속에서 기술은 발전하고, 인간은 점점 더 피로감을 느끼고 있으며, 이 피로는 우리가 새로운 형태의 관계를 찾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반려동물, 반려식물, 나아가 반려돌처럼 단순하고 책임이 적은 관계가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현상을 보며 나는 우리가 지금 어떤 변환점 위에 서 있는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이 변화의 방향성이, 현상만 놓고 본다면 '옳을지도 모르겠다'라는 아이러니를 느낀다.
4.
인간은 무엇을 하고, 어떤 역할을 하려고 하는가?
인간은 점차 기술과 융합된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이 기계화는 터미네이터처럼 차갑고 메탈릭한 모습이 아니라, 유기체적으로 진화한 인간에 가까울 것으로 본다. 기술과 인간의 경계는 흐려지고, 신체는 점차 기계적인 연장선으로 확장되고 있다. 인간의 수명은 연장되고, 기존과는 다른 존재로 변모시키고 있다.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
발전 속에서 인간은 점점 더 감각을 잃어가고 있다. 스마트폰 스크린, VR 기기,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은 우리의 촉각, 시각, 청각을 빼앗아가고, 우리는 점점 현실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유모차도 자동화되어 알아서 혼자 다니는 미래까지 상상한다면, 인간의 삶에서 ‘책임’과 ‘의무’는 점차 사회 시스템과 기계에 온전히 맡겨진 후일 것이다.
5.
자연친화적인 입장에서, 지구에서 인간은 줄어드는 것이 옳다. 세계 인구는 여전히 증가하고 있으며, 사실상 저출생을 걱정하는 것은 지역적 문제일 뿐, 지구 차원에서는 인간이라는 종이 과잉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마블의 영화 어벤져스에서 타노스라는 악역이 등장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지구는 우리를 감당할 수 없으며,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인구가 줄어드는 방향이 필연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시적으로 보면, 이 변화를 견뎌내야 하는 것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다. 결혼은 더 이상 필수가 아니게 되었고, 인간은 진화의 전통적인 방식을 거스르며 압도적인 기술 발전과 기계화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삶을 받아들이고 있다. 나와 같은 청년 세대는 기후 위기가 터지든, 화성을 개척하든, 경제가 붕괴하든 그 모든 것보다 더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다. 취업의 어려움, 결혼과 출산에 대한 부담, 그리고 점점 더 불확실해지는, 삶의 동력이 사라진 미래.
그렇게 결국 우리는 고통을 함께 나눌 반려자가 아니라, 고통을 잊게 해 줄 존재를 원하게 된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무거움을 덜어낼 이형의 존재. 그것이 반려식물이든, 반려돌이든, 혹은 미래의 어떤 형태로든, 우리는 점점 더 자신과 비슷하지 않은, 책임과 의무를 묻지 않는 존재에 의지하려 한다.
6.
인간 존재의 근본을 찾기 위해 흔히 진화론적인 해석에 의존한다. 그건 옳은 해석이면서도 대체로 끼워맞춰진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진화론적으로 유전자의 존속이 인간 삶의 궁극적 목적이 아닐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기존의 진화론적 패러다임을 거부하며 새로운 ‘신인류’로 변모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형의 존재.
어릴 때 나는 디지몬을 보며 자랐다. 포켓몬도 재미있었지만, 포켓몬은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채 인간의 명령에 따라 싸우는 존재였던 데에 반해 디지몬은 인간과 소통하며 함께 성장하고, 서로 유대감을 쌓아가는 존재였다. 디지몬은 단순히 전투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나와 함께 역경을 헤쳐 나가는 동반자이자 친구였다. 그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삶의 도전에 함께 맞서야 하는 반려자와 귀여움과 행복감을 주는 반려견의 장점을 합친 어떤 이상적인 존재였다. 특히 내가 좋아했던 테리어몬은 귀엽기도 했으니까. 상상속에서는 한번 진지하게 키워보고 싶었다.
언젠가는 AI에 의한 소프트웨어적인 발달과 함께, 유기체를 실제로 구현하는 하드웨어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진다면, 디지몬이 실제로 생기지 않을까. 반려자와 반려견의 장점을 합친 디지털 생명체. 이들은 가끔은 가상세계로 집어넣어 반려돌처럼 단순한 무생물처럼 가벼운 관계도 가능하다. 역시 디지몬이 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