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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임브리지의 E-Luminate 페스티벌

영국도시문화기행 - 2월 케임브리지

by Elena

제법 봄이 올 법도 하건만, 영국의 겨울은 아직도 차가운 바람을 불어대며 자신의 건재함을 알린다. 오후 5시, 하늘이 어둑해지면 상점도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하고, 검푸른 하늘 아래 건물과 가로등은 별처럼 반짝인다. 각자의 방에서 모두가 숨죽여 이 모습을 보는 듯 영국의 도시는 이내 고요해진다. 하지만 같은 시각, 케임브리지 사람들만큼은 2월의 기나긴 겨울밤을 빛으로 환히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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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 대한 첫 번째 기억

케임브리지란 이름을 들으면 나는 ‘캠브리지’라는 양복 브랜드를 떠올린다. 주말마다 가던 백화점 입구에 자리하고 있던 캠브리지에는 멋진 양복을 입은 마네킹이 세워져 있었고, 그 옆에는 한적해 보이는 케임강 풍경 사진이 걸려있었다. 덕분에 케임브리지는 나에게 ‘거리마다 멋진 양복과 드레스를 입은 신사 숙녀들을 볼 수 있는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도시’라는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미래에 천천히 흐르는 케임강을 따라 걷는 나를 상상하기도 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도시에 대한 기억은 흐릿해져 갔다. 그리고 며칠 전, 달리는 기차 안에서 ‘To-Cambridge’라 적힌 표를 움켜쥐고 한참 동안 바라본 후에야 비로소 오래전 보았던 사진 속 도시, 케임브리지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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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미의 대명사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지만, 오래전부터 가고 싶어 하던 도시였기 때문에 기대는 높아져만 갔다. 놀랍게도 케임브리지는 다양한 기대를 충족시킬만한 각양각색의 매력을 갖추고 있다. 어느 유명한 책 제목처럼, 도시의 시간은 멈춰져 있고, 때때로 거꾸로 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케임브리지의 모든 거리, 건물에는 지성인의 향기가 배어 있다. 도로 위로는 차와 자전거가 함께 달리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책을 가득 담은 백팩을 메고 있다. 아이작 뉴턴의 사과나무를 비롯하여 도시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지성인들의 고뇌는 말끔한 양복을 입은 신사 없이도 도시를 고풍스럽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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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품은 도시

점심을 먹은 뒤 정처 없이 거리를 거닐다 보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었다. 해가 점차 지면에 가까워지며 도시가 빛으로 물들어갈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나는 케임브리지의 또 다른 모습을 만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2014년을 시작으로 매년 2월 진행되는 캠브리지 ‘E-Luminate’ 축제는 현대미술과 기술을 도시 내 상징적인 건물들과 공공장소를 배경으로 하여 선보이는 색다른 형식의 현대미술 축제이다. 과거에 머물러있는 줄만 알았던 도시에서 이토록 미래 지향적인 축제가 열릴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도시 곳곳에 설치된 현대 미술 작품은 물론이고, 축제가 열리는 나흘 동안 ‘Play of Light’라는 테마로 진행되는 워크숍에 참석할 수도 있다. ‘기술, 산업, 도시, 세계화와 놀기’, ‘케임브리지의 첫 E스포츠 데이’, ‘생물학, 예술, 교육, 문학과 놀기’, ‘소설, 마술, 코미디와 놀기’ 등 세분된 워크숍의 주제는 상당히 신선한 조합으로 구성되어 호기심을 자극한다. 하지만 대부분 워크숍은 평일에 진행되었고, 주말에 찾아간 나는 아쉬운 대로 저녁 6시 반부터 한 시간 동안 진행되는 ‘축제 투어 가이드’를 신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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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동안 진행된 투어 가이드는 작가들의 작품이 설치된 장소를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해당 건물과 작품을 유기적으로 설명했다. 작품 이외에도 스티븐 호킹 박사의 ‘시간을 먹는 시계’와 같이 오가며 마주쳤던 거리 위 설치물에 대한 짧은 안내도 곁들였다. 상당수의 작품이 물리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고안되었다는 점은 작품을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존 벤이 다니던 대학 건물 입구에서는 그가 고안한 ‘벤 다이어그램’을 빛으로 표현한 작품도 만날 수 있었고, 케임브리지 대학 이사회관과 올드 스쿨 전체 파사드에는 그로스테스트의 우주론과 빛에 대한 영상이 선을 보였다. 잠시나마 관람객들은 우주를 느끼며 함께 황홀함을 맛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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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보았던 케임브리지는 단지 케임강의 잔잔한 강물처럼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맡긴 채 천천히 흘러가는 곳이었던 반면, 해가 진 이후로 유서 깊은 이 도시는 감춰져 있던 기술적이면서도 예술적인 도시의 면모를 드러냈다. 반전 매력이 있는 이 도시는 과거와 현재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수많은 인류에게 영감의 원천으로 남을 것이다.


*본 글은 2017년도에 도시문화컨텐츠 매거진 '어반폴리'에서 매월 1회 연재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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