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도시문화기행 - 1월 뉴캐슬
여행의 묘미란 ‘낯섦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영국에서 그 묘미를 가장 잘 느끼기 위해서는 시골 풍경을 보러 떠나야 한다. 들판 한가운데 앉아 단잠을 자는 오리와 젖소들, 스산한 들판 너머로 보이는 옹기종기 모인 붉은 지붕과 오래된 성벽은 한국에서 보던 시골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최근 알게 된 중소도시 뉴캐슬은 영국의 시골 인심을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로 몇 년 전부터 문화재생도시로 주목받고 있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 과거 산업혁명의 급격한 성장은 영국 북부와 남부지역의 빈부 격차를 유발했다. 그러자 영국 북부의 유령도시 중 하나였던 뉴캐슬은 낙후된 도시를 살리기 위한 방안으로 ‘문화’를 선택했다.
1998년 철재로 만든 안토니 곰리의 ‘북쪽의 천사’ 조형물 설치를 시작으로 밀가루 제분소를 개조한 ‘발틱 현대미술관’, 뉴캐슬의 랜드마크 ‘밀레니엄 브릿지’, 소라 껍데기 형상의 ‘세이지 음악당’까지. 다양한 문화 공간이 뉴캐슬 지역 곳곳에 건축되며 연 200만명의 관광객이 뉴캐슬을 찾는 이유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정작 나는 인터넷에 올라온 몇 개의 건축물 소개만으로는 ‘문화로 재생된 도시’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실감할 수 없었다. 이 도시의 매력을 보여줄 만한 중심 내용이 빠진 듯한 느낌이랄까. 결국, 직접 이를 알아보러 도시에 찾아가기로 했다.
뉴캐슬에 도착하여 처음 방문했던 곳은 발틱 현대미술관의 스튜디오 갤러리인 ‘발틱39’ 였다. 발틱 미술관은 영국에서 테이트 모던 다음으로 큰 현대 미술관으로, 몇 년 전부터 뉴캐슬 노덤브리아 대학교의 예술대학과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스튜디오의 일정 공간을 학생들에게 내어주고 프로젝트 이벤트와 크리틱을 진행하는 등 활발한 교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발틱39’ 건물 4층에 위치한 2개의 전시장에서는 아티스트들이 작업에 한창이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옆에 있던 안내 요원이 다가와 작품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해주었다. 더불어 ‘뉴캐슬이 문화 도시라고 해서 왔다’고 말하니 갑자기 가방을 뒤적여 펜을 꺼내 들었다. 이내 발틱 이외에 ‘Vane Gallery’를 비롯하여 ‘Lit and Phil Library’, ‘Newcastle Castle’, ‘Laing Art Gallery’ 등 뉴캐슬의 문화 핫 스팟들이 적힌 종이를 받을 수 있었다.
추천받아 찾아간 건물들은 갤러리가 있을 만한 곳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투박하고 허름했다. 갤러리를 코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해 몇 분을 뱅뱅 돌 정도였다. 충격적이게도 이 허름한 갤러리 안에는 개성 넘치는 굉장한 작품들로 가득했다. 그냥 눈으로 보아도 훌륭한데, 종이에 프린트된 자세한 큐레이팅 덕분에 한층 깊은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장소를 이동하는 중에 길에서 보았던 동상, 건축사무소 유리창에 붙어있던 프로젝트 작업, 짝짝이 스타킹을 신은 거대한 말 동상까지, 거리를 채우고 있는 모든 것이 마치 ‘예술이 뭐 별거야’라고 말하듯 낡고 자유로웠으며 꾸밈이 없었다.
발틱 현대미술관은 타인 강을 사이에 두고 뉴캐슬 건너편에 위치한 게이츠헤드시에 자리하고 있다. 가는 길에 밀레니엄 브릿지와 세이지 음악당을 볼 수 있는데, 그래서인지 어느 길에서부터 길을 걷는 모든 사람이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가는 길에 마주친 거리 악사들의 흥겨운 색소폰 연주는 감성적인 분위기를 한껏 돋웠다.
발틱 현대 미술관은 큰 규모에도 불구하고 동네에서 만나는 작은 미술관처럼 친근한 느낌을 들게 했다. 이는 미술관 안에 있는 작은 도서관을 더불어 다양한 지역연계, 아동 프로그램이 많기 때문이다. 우선, 예술에 관심과 소질이 있는 14 ~19세 아이들로 구성된 예술창작그룹 ‘Art Mix’를 위한 hub space가 눈에 띄었다. 또한, 필요로 하는 학교에 한해 현대미술을 이용한 아동의 창의력 증진 개발 프로그램 ‘Baltic stars’를 진행하고 있다. 뉴캐슬 아이들에게 미술관은 어렵고 두려운 곳이 아닌 게임을 하며 노는 곳, 내 생각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곳이었다. 즐거운 것들이 기다리고 있어 매일 가고 싶은 곳 말이다.
예쁜 그림이 그려진 카드를 들고 게임을 즐기는 아이들을 몇 분간 물끄러미 바라보며 깨달았다. 그들의 지역에 활기를 가져온 것은 갤러리 몇 개가 아니었다. 뉴캐슬 사람들은 거리, 미술관, 학교 어디가 되었든지 마치 ‘별 것’ 아닌 것처럼 쉽고 가볍게 ‘문화’와 ‘예술’을 즐긴다. 그런 분위기는 이웃과 함께 예술, 그리고 삶을 공유하고 나누는 커뮤니티를 만들었고, 작지만 강했던 문화 공동체의 힘은 비로소 침체되었던 도시를 작지만 풍요로운 문화 재생 도시로 성장하게 만들었다.
*본 글은 2017년도에 도시문화컨텐츠 매거진 '어반폴리'에서 매월 1회 연재되었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