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와 어른이 되는 것의 상관관계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시절부터 줄곧 '모자를 쓴다'라는 행위는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나에게 모자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물건'이었고, 모자를 쓸 때면, '나 여기 있소'하고 나의 존재를 알리지 못해 안달난 사람이 된 느낌이 되는게 싫었다. 그래서 나는 매번 예쁜 모자를 보아도 쓰기를 주저했다. 안다. 이건 분명 나의 의식과잉이다. 하지만 한 번 박힌 인식은 그리 쉽게 고쳐지지 않았고, 그렇게 모자를 쓰지 못하는 소심쟁이로 살아온지 24년이 되던 지난 겨울. 일주일의 스페인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집을 나서기 전 항상 모자를 챙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독서를 즐겨하지만 짐을 늘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 탓에 가지고 있는 책은 열 권이 채 되지 않는다. 얼마전 책장 정리를 하다가 그 중 세권이 스페인 관련 서적이라는 점을 발견했다. 스페인 역사, 디자인, 풍경사진 관련 서적. 특별히 가고 싶은 장소가 있는 것도, 애정을 가지고 있는 나라도 아니었는데 참 희한한 일이었다. 세 권 중 한 권은 염리동의 한 독립 서점에서 산 필름 사진집이었는데, 마치 상상 속에 존재하는 공간을 보는 듯 생동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마지막 장에는 햇빛에 반짝이는 바다 사진이 있었는데, 언젠가 갔던 바다가 문득 떠올랐다. 꽤나 기분 좋았던 기억으로 남았는지 코 끝에 어렴풋이 그 날 바다의 소금냄새가 나는 듯 했다. 꽤 오랫동안 사진을 바라보다가 사진 속 바다를 보러 가야겠다고 결심했고, 지난 겨울 스페인으로 떠났다.
스페인은 상상 이상으로 넓고 멋졌다. 고전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황량한 초원을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달리기도 했고, 눈을 의심케하는 화려한 궁전들과 성당들은 그 옛날에 지어진 것이라고 도무지 믿기 힘들 정도로 정교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스페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건 다름아닌 식당의 종업원들이었다.
그들은 절대 먼저 물어보는 법이 없었다. 자신이 한 가지 일밖에 하지 못하는 로봇인양 손님에게 무심했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은데 주문을 안받아서 이집 저집 돌아다닌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처음엔 나한테만 그러는건가 싶어서 괜히 기분이 나빴는데, 조금 지나자 나와 비슷한 표정으로 가게를 나가는 손님들이 많다는 걸 알았다. 그제야 나는 그게 스페인 사람들의 특성임을 받아들였다.
가지고 있던 편견을 버리고 바라본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은 한창 붐인 YOLO(You Only Live Once). 그 자체였다. 여유롭고 즐겁게 사는 삶에 서두르고 급한 일이란 없다. 손님이 적으면 적은대로 한 사람을 존중하여 대접하는 것에 집중한다. 낮에는 가게 문을 닫고 '시에스타'(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를 즐기기도 하고, 자정 넘어서까지 식사를 즐긴다. 흥이나면 정열적인 민속 춤 플라멩코를 추며 에너지를 발산하는 그들의 삶은 이 시대가 바라는 진정한 YOLO였다.
스페인에서 만난 사람들은 나를 능동적이고 개방적으로 만들었다. 유럽의 발코니로 불리는 네르하 해변의 돌담에 혼자 앉아 책을 읽는 소녀. 동화 속 마을 같던 신트라 골목길에서 아코디언을 불던 흥 많던 아저씨, 스페인의 산토리니, 프리힐리아나에서 이제껏 모은 수집품으로 앤티크 샵을 운영하던 할머니가 그랬다. 자신의 감정과 취향을 자신의 방식대로 마음껏 표현하는 사람들을 마주칠 때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보자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처음엔 쉽지 않았다. 남들 시선 때문에 포기하거나 부정했던 습관때문에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기란 어려웠다.
스페인에서 내가 해냈던 첫 도전은 라피아 햇을 쓴 것이었다. 꽤 추운 날씨였지만, 내리쬐는 강렬한 햇빛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고, 프리힐리아나의 한 앤티크 샵에서 검은 색 띠가 매진 둥근 밀짚모자, 라피아 햇을 발견했다. 거울 앞에 서서 모자를 쓰는 순간은 눈을 질끈 감고 싶을 만큼 너무나 어색했지만, 조심스레 눈을 뜨고, 이것 또한 연습이다하는 생각으로 모자와 함께 가게를 나섰다.
라피아 햇을 시작으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이나 혹은 부끄럽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여행 중에 하나 둘 도전해보기 시작했다. 사람이 많아서 예전 같았으면 지나쳤을 법도 한데 얼른 자리를 잡고 뻔뻔한 척 포즈를 잡았고, 종업원이 도통 이쪽을 보지 않으면 큰 소리로 '올라!'하고 소리치기도 했다. 몸에 딱 붙는 민소매 티를 입었던 날엔 몇몇 여행객들이 옷이 예쁘다며 먼저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용기를 내니 이전까지 생각지도 못한 반응을 얻었다.
이제 곧 스페인 여행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지 9개월이 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내 마음을 부정하려들지 않는다. 남의 시선보다 내 마음 속 이야기를 듣는다. 오늘도 어김없이 모자를 쓰며 마음 속으로 외쳐본다. 오늘도 YOL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