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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영신 Jan 25. 2019

[이전글]"정치, 막장드라마보다 재미" 그나마 최고칭찬

[총선 게릴라칼럼] 선거 보도, 권력 놀음보다 정책·공약 전달에 힘써야 

<오마이뉴스>, 2016년 3월 30일 게재.


"권력은 수단이 아닐세. 그건 목적이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빅 브라더'를 대변하는 당원 오브라이언이 한 말이다. 권력자들은 자신에게 힘이 주어지면 그것을 통해(수단) 대중을 위한 정치를 펴겠다(목적)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들의 욕망은 '권력 추구 자체'일 뿐이라는 고백이다. 권력의 목적은 오직 '권력'이라는 것이다. 대중들이 꿈꾸는 정의나 공익의 실현이 아니라. 


'권력 다툼'에 매몰되는 에너지가 아깝다

4·13 총선을 앞둔 정치인들이 지난주까지 벌인 공천 파동을 보면 저 말이 딱 들어맞는 것처럼 보인다. 새누리당은 살생부 논란, 여론조사 유출사태, 윤상현 욕설 녹취록 파문, 유승민 탈당과 김무성의 옥새 투쟁 등 온갖 추태를 보이며 진박과 비박 간 '계파 싸움'을 벌였다. 더불어민주당 역시 '정무적 판단'으로 인한 '친노' 컷오프, 김종인의 비례 2번 셀프 공천 및 독단적 리더십 논란 등 해묵은 정치공학적 권력 다툼을 보였다. 

새정치를 하겠다던 국민의당도 마찬가지다. 당이 생길 때부터 공천 가능성을 염두에 둔 주판 튕기기에 열심이더니, 급기야 공천 탈락자가 도끼를 꺼낼 정도로 살벌한 내홍을 드러냈다.  

▲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영도다리 고뇌'를 전한 <조선일보> 보도 갈무리 ⓒ 조선일보


이처럼 여야 막론하고 '권력을 달라'고 외치는 정치인들에게서 '사회를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겠다'는 비전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그들만의 천박한 밥그릇 싸움만 있을 뿐이었다.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가 말하듯 "87년 이후, 아니 그 전까지 포함해도 이번 선거처럼 '정책'이 선거에서 사라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김동춘, '바닥을 향한 질주'를 되돌릴 수 있을까?, <한겨레> 3월 23일 자 중에서)   

4년마다 돌아오는 '민주주의의 축제'를 맞아 온 사회의 에너지가 선거로 쏠리고 있다. 그런데도 이 펄펄 끓는 에너지가 권력자들의 권력 놀음에 모조리 처박히고 있으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택시 기사, 구둣방 아저씨, 직장 동료 등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정치 얘기를 해봐도 모두 저들의 권력 다툼에 대한 내용뿐이다. "막장 드라마보다 재미는 있대"라는 말이 요즘 정치에 보내는 그나마 '최고의 칭찬'이다.    


정치인 '권력 놀음'에만 주목하는 한국 언론
          

왜 이럴까? 왜 한국 정치에는 오직 '목적뿐인 권력'만 판을 치는 걸까? 권력을 통해 구현해야 할 다양한 비전과 담론은 대체 어디로 실종된 걸까?

물론 한국 정치 자체에 이렇다 할 미래지향적 콘텐츠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한국 언론이 정치인들의 권력 놀음에 과도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정작 중요한 정책·공약에 대해서는 소홀한 태도를 취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나마 남아있는 콘텐츠마저 말살해 버린다. 

지난 필리버스터 정국에서 드러난 일부 의원들의 깊이 있는 연설들을 돌이켜 보자. 8시간, 10시간 동안 쉴 새 없이 뱉어내던 말의 향연은 '한국 정치도 충분히 큰 그릇에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수많은 시민이 필리버스터에 열광한 것도 이 같은 한국 정치의 저력을 재확인했기 때문이다. '혼'보다는 '이성'에 의지하고, '주먹'보다 '말'을 앞세우고, '주술이 어긋난 문장'이 아니라 '제대로 된 문장'을 구사하며 시대정신과 가치를 설파하는 정치인이 우리에게도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 그 말들은 다 어디 갔을까? 24시간 생중계하던 국회TV와 <오마이뉴스> 등 인터넷 언론이 특별 가동을 멈추자, 제도권 언론 속에서 '뼈 있는 말'은 다시 자취를 감췄다. 남은 건 권력을 탐하는 정치인들의 제 밥그릇 두들기는 소음뿐이다.    

▲  더불어민주당의 '친노 컷오프' 소식을 전한  보도 ⓒ KBS


선거 보도 90%가 정당 갈등, 권력 다툼에 치중
            

민주언론시민연합이 3월 10일~23(방송)·24(신문)일 5개 일간지, 8개 방송의 '선거 보도 소재'를 분석한 내용을 보면, 공약·정책 소개나 검증은 없고 정당 내부갈등과 판세분석만 무성하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방송의 경우, '정당 내부갈등' 보도가 368건(45.8%)으로 가장 많았고 '후보자 선출 및 지명' 관련 보도가 250건(31.1%)으로 그 뒤를 따랐다. 그다음으로 '정당 선거전략' 보도(65건, 8.1%), '판세분석이나 관전 포인트'를 다룬 보도(43건, 5.4%)가 이어졌다. 이들 보도를 모두 합하면 전체 선거 보도 중 90.4%에 달한다. 

신문 역시 정당 내 내부갈등을 다룬 기사가 467건(30.8%)으로 가장 많았고 그다음으로 후보 선출·지명·경선 기사가 441건(29.1%)이었다. 정당 선거 전략과 공식논평 기사는 172건(11.3%)으로 나타났다.

  

▲  민언련이 분석한 주요 방송의 선거보도 소재. ⓒ 민주언론시민연합


이처럼 방송·신문 할 것 없이 정치인들이 서로 물고 뜯는 싸움에만 몰두하니 마치 '궁중 암투를 다루는 사극'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도대체 왜 대한민국 시민들이 아까운 시간을 들여 정치인들의 박 터지는 갈등이나 권력 다툼만 쳐다보고 있어야 하는가?   

"한국의 정치 기자들, 그들의 시간이 아깝다"

한국 언론의 정치 보도가 어떤 수준인지, 30년 이상 기자 경력의 한 대(大)기자가 한 고백을 들어보자. 

"예전에 정치부 기자를 꽤 오래 했는데 그때는 엉뚱하게 밥값 생각을 많이 했다. (...) 일상의 취재도 낭비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민정계, 상도동계, 동교동계, JP계, 허주(김윤환 전 의원의 아호)계, 당권파, 비당권파, 주류, 비주류, 중도파, 관망파, TK, PK 등등. 정치인 각자가 어떤 의정 활동을 하는지보다는 그들이 속한 대규모나 중간 규모의 그룹이 어느 집단과 이합집산을 벌이는지가 정치부 기자가 파악해야 할 최우선 과제였다. 그러자면 그들이 어디서 태어났는지, 무슨 학교를 나왔는지, 누구 덕에 정치에 입문했는지, 지금은 누구와 밥이나 술을 자주 먹는지 알아야 했다. 

오랫동안 피를 말려가며, 선배들이 '정치공학'이라고 부르는 그런 이상한 기사를 참 많이도 썼지만 지금 기억에 남는 것은 단 한 꼭지도 없다. 어찌 된 일인지 우리 정치에서는 언제나 내용보다는 틀이 강력하고 중요했다." (문정우, 아직도 '김일성 만세'에 우리의 자유가 있다, <시사인> 432호)

그는 과거 자신이 쓴 것과 같은 정치 기사를 지금도 열심히 쓰고 있는 기자들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오늘도 모두가 진박, 비박, 친노, 비노 등등 수많은 계파를 열심히 좇으며 별 의미 없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관련한 기사를 쏟아내야 하는 수많은 기자들의 밥값, 기름값, 무엇보다도 젊은 그들의 시간이 아깝다. 미안하지만 내가 전에 썼던 수많은 정치 기사들이 그랬듯이 이번 일과 관련한 기사들이 갈 곳 역시 쓰레기통밖에 없다. 친노, 비노, 친안, 호남, 비호남, 수도권, 개혁, 혁신 따위 어휘로 범벅이 된 그 기사들에 생명력이란 없다."

내 삶과 우리 사회의 '미래'가 알고 싶다


난장판 공천 정국이 끝나고 이제 각 당은 선대위 체제로 본격 전환했다. 31일부터는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다. 그러나 막상 신문과 방송 보도를 보면, 아직도 권력 다툼의 여진이나 판세를 중계하는 '경마 저널리즘'이 판을 치고 있다. 총선을 통해 발전시켜나가야 할 시대정신과 사회적 과제는 아예 없거나 지면·화면 구석에 처박혀 있다. 

시민들이 원하는 진짜 정보는 이번 선거를 통해 '내 삶이 어떻게 나아질 수 있을까', '우리 사회가 어떻게 성숙할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다. 각 정당이 꿈꾸는 사회의 모습은 대체 무엇인지, 그것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실현 가능성은 어느 정돈지, 그들의 약속에 과연 진정성이 있는지 등이 진짜 알고 싶은 것이다. 

각 정당에 제대로 된 콘텐츠가 없다고 외면해버릴 일이 아니다. 언론이 작은 사안이라도 의도적으로 발굴하고 주목하는 노력이 이어져야 빈약한 정치 콘텐츠도 더 발전하는 선순환이 일어나지 않을까? 별로 중요하지도 않는 것을 대단한 일마냥 부풀리던 것이야말로 바로 언론이 제일 잘하는 일 아니던가. 

가령 김무성 대표가 부산 영도다리에서 지은 고뇌의 찬 표정을 대서특필하는 것과 같은. 그 실력을 숨겨진 정책·공약, 아젠다를 발굴하고 보도하는 데 사용하는 게 한국 사회를 위해 더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여느 정치인들에게 권력은 정말 수단이 아니라 목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언론과 시민이 그 권력을 목적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한 방법 중 하나는 바로 그들 '권력 놀음'에 함께 놀아나지 않는 자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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