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시 vs 스완지시티 직관기
런던 언더그라운드의
FULHAM BROADWAY STATION.
이름만 들어도 왠지 최소 하나의 축구팀을 떠오르게 하는 지하철 역.
출구를 통해 나가면 꼭 풀럼FC 홈구장이 떡 하니 기다리고 있을 것 같지만, 이곳은 의외로 첼시의 홈구장 스탬포드 브릿지가 있는 곳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FULHAM 이라는 지역의 서쪽 끝에 크레이븐 코티지가 있고 동쪽 끝에는 첼시 홈구장이, 그리고 그 주변에 FULHAM BROADWAY 역이 있다 (몰라도 되는 잡지식)
첼시 구단의 홈구장 스탬포드 브릿지는 정말 오랜만이다. 예전에는 자주 와서 경기도 보고, 어웨이 버스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선수들을 기다리곤 했는데..그게 벌써 2년이 넘었으니..
하지만, 2년이 지나든 3년이 지나든 이곳은 변하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경기 날 역 앞의 풍경.
핫도그 트럭과 오피셜 노점상.
MATCH DAY PROGRAMME 판매자들.
그리고 마치 물결 위에 올라탄 듯 한 방향으로만 향하는 군중들.
정말 한결같다.
2년 전, 아니 2010년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비교해도 마치 모든 게 프로그래밍 되어 움직이는 것 처럼 그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았다.
(나만 더 나이들어서 왔.....)
역에서 나와 군중 물결에 올라타 약 200m 남짓한 거리를 걷다보면 어느새 좌측에 스탬포드 브릿지가 나타난다. 그리고 역시나 호화 구단답게 경기장 곳곳에 12월이라고 크리스마스 장식을 아낌없이 듬뿍 발라놓았다.
다른 구장과 다르게 스탬포드 브릿지 경기장 입장은 정말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하다.
1.자연스러운 발걸음 (나 불법티켓 아님)
2.눈인사 (나 위험한 사람 아님)
3.바코드 인식 (나 이거 잘해요)
4.입장 (오예)
그리고
먹방타임!
이라고 해봤자 그닥 먹을 게 없는 현실.
피쉬앤칩스라도 팔면 좋을텐데.. 씹어 먹을 수 있는 거라곤 눅눅한 핫도그와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파이 뿐.
뭐 선택의 여지가 있나. 다음번엔 꼭 밖 노점상에서 파는 조금 더 맛나보이는 햄버거를 먹겠다고 다짐하며 이번에도 눅눅이 핫도그를 주문했다.
사실 경기장 내 홀에서 먹는 음식은 맛 보다는 그 분위기에 취해서 먹는 것 같다. 이곳은 허기를 달래기 위한 식당이라기 보다는, 경기 전 프리뷰 방송을 보며 삼삼오오 모여서 축구 이야기를 꽃피우는 목적의 공간이다보니 정말 시끄럽고 정말 복잡하고 정말 영어영어 축구축구 한 곳이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무언가 씹어먹는 사람들 보다는 한 손에 맥주나 마실거리를 들고 대화하는 사람들이 대다수. (그러니 나처럼 빵들고 인증샷 찍으면 '저 관광 왔어요' 인증)
이번에도 아주 좋은 자리 당첨이다.
예전에는 첼시 멤버십이 있어서 티켓 구매 걱정 없이 경기보러 다녔는데, 이제 원래 가격의 몇 배나 더 주고 티켓 익스체인지를 통해 봐야하다니..
이런게 관광객의 비애가 아닐까.
자꾸 옛날 옛날 과거 얘기하는데,
또 과거 이야기다.
그 땐 항상 HOME SUPPORTERS 응원석에 앉아서 경기를 봤기 때문에 90분 내내 서서 소리지르고 노래부르느라 (가사 못외워서 흥얼 거리느라) 추운줄도 모르고 경기를 봤는데,
이번에 앉은 곳은 처음 앉아보는 벤치 맞은편 WEST STAND. 그런데 이 자리가 기가막힌 게.. 천장에 히터가 달려있다. 카타르 축구 경기장에 에어컨 있다는 소리는 들어봤는데, 그렇게 자주 오던 첼시 구장에 히터가 있을 줄이야..
이곳에 앉으니 바람이 불어도 하나도 춥지 않고, 오히려 따듯한 온기가 돌았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너무 정적인 분위기라는 사실. 소곤소곤 웅성웅성 대화하는 소리를 듣기 보단 차라리 히터가 없어도 골대 뒤 응원석에서 방방 뛰고 소리지르며 경기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리뉴가 감독으로 있던 시절, "우리 첼시 팬들은 서포터즈들을 제외하곤 너무 응원이 얌전하다" 라는 말을 했던 적이 있는데, 여기 앉아있으니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더라.
경기 종료. (응? 벌써?)
결과가 무슨 의미가 있으랴. 다만 오늘 기성용 선수가 선발 출전했고, 그가 곧 어웨이 버스를 타러 나올꺼라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스탬포드 브릿지에 올 때마다 경기 종료후에는 부지런히 어웨이 버스 대기 장소로 간다.
아무리 일찍 뛰어가도 그곳에 도착하면 최소 30명 정도의 스튜어드들과 다수의 경찰이 버스 주변과 주차장 출구를 지킨다.
왜?
혹시 모를 홈관중과 어웨이 팬들의 돌발 행동을 막기위해. 그런데 오늘은 뭐..
꼴지팀 스완지에게 누가 앙심을 품으랴..
게다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완지 선수들을 보겠다고 추운 날씨 속에서 한 시간씩 기다릴까.
다행히도 이 날은 몇몇 한국인들과 선수 지인들, 선수 사인 수집가, 덕후 어웨이 팬 빼고는 많은 인파가 몰리지 않았다.
기성용 선수가 2012년 스완지시티에 입단한 이후 그가 뛰는 경기를 몇 번 직관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한.. 3년 만인가? 아주 오랜만에 어웨이 버스를 타기 위해 경기장을 빠져나오는 기성용 선수의 모습을 봤다. 잉글랜드에서 만난 한국 선수 대 한국 팬의 만남이라 더 그럴까..기성용은 짧은 순간이지만 그 짧은 순간에 짧은 대화가 가능한 선수였다. (그래봤자, "경기 잘봤어요! 고생하셨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정도이지만)
대부분의 선수들은 경기에 패한 날은 어웨이 버스 옆에서 팬들이 기다리든 날씨가 어떻든 신경쓰지 않고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바로 버스 안으로 들어가버리는데, 기성용 선수는 조금 다르다.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게 들리면, 그게 한국어든 영어든 고개를 돌려 쳐다보고, 손에 짐이 있을 때는 버스에 놓고 다시 내려오겠다는 표현을 한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부터 차례대로 돌아가며 사진을 찍고 사인을 해주며 아이컨택과 진심이 느껴지는 미소도 잊지 않는다.
그리고보니 2014년 기성용 선수가 임대로 뛰던 선덜랜드가 스탬포드 브릿지 원정을 왔을 때도 이곳에서 어웨이 선수들을 기다린 적이 있다. 그 땐 기성용의 부상 결장으로 아쉽게도 볼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그 아쉬움을 충분히 달랠 수 있었다.
언제 또 잉글랜드까지 날아와서 프리미어리그 직관을 하게 될지 모르니.. 어쩌면 이번이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기성용 선수 경기를 직관하고, 이렇게 경기장 밖에서 함께 사진을 찍은 게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
그곳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탬포드 브릿지여서 좋았고, 팀의 당당한 주전으로, 부상없이 건강한 모습으로 경기를 뛴 기성용 선수를 볼 수 있어서 더욱 의미 있었던 스탬포드 브릿지 직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