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어도 되냐옹?
얼마전까지만 해도 밖에 나가자고 하면 덥네 습하네 어쩌구저쩌구 핑계를 늘어놓던 집사놈이 최근 아침 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걸 알아챘는지, 오늘은 마음이 바뀌었나보다.
몇 달만에 밖에 나오니 그새 잔디가 참 많이 자랐구나.
냥적으로 생각해보면 잔디는 참 신기하고 흥미로운 식물이다. 창문을 통해 바라봤을 땐 이게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생각이 1도 들지 않는데, 직접 밟아보면 세상 이렇게 신기한 게 없다. 길이도 제각각, 냄새도 다르고 심지어 한폴한폴 색깔도 다 다르다. 언젠가 함께 사는 보리가 그랬다. 만약 통조림 10개와 잔디 한웅큼을 선택해야 한다면, 난 잔디 한웅큼을 씹어먹고 2시간 뒤에 작렬하게 토를 하겠노라고. (헤어볼을 뱉어내는데 잔디만한 게 없다나 뭐라나)
물론 나는 잔디를 먹지 않는다. 왜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잔디, 캣닢, 캣그라스 뭐 이런 것들에 식성이 전혀 돋지 않는다. 대신 나는 창문을 통해 바라보던 잔디를 내 앞발 뒷발로 직접 밟으며 하나하나 냄새를 맡고 각기 묘하게 다른 그 색을 낸 두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게 좋다. 이런 마음을 집사놈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긴몰라도 그녀석은 그저 내가 아직도 철 없이 문만 열만 밖으로 튀어나가고 싶어하는 어린 꼬물이 정도로 생각하는 게 아닐까..
"이거 원 잔디가 이렇게 깊어서 내가 우아하게 걸을 수가 없으니
귀하께서 잔디를 좀 깎아주셔야겠소. (애기씨 버전인데 아는 사람이 있을까)"
영국에서 잔디 좀 뜯어먹던 이 녀석은 (나보다 4살 많음) 내 덕분에 오늘도 한국산 잔디를 먹을 수 있게 됐다.
영국산, 한국산 잔디에도 그런 차이가 있냐고? 나야 모르지. 이 좁은 테라스 말고는 바깥 구경을 해보질 못했으니. 하지만 저 녀석은 산전수전 다 겪은 고양이라서 해외경험도 있고 영국 냥이들과 대화도 싸움도 썸도 타 봤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보리의 말에 의하면, 영국의 잔디는 4계절 내내 초록색이 유지된다고 하던데, 세상에 그게 어떻게 말이 되냐옹. 비행기 안타봤다고 누굴 바보로 아나.
집사놈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잔디들은 이녀석이 밖으로 나오면 바들바들 떨어댄다. 난 그게 느껴진다.
잔디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얼마나 무서울까..얼굴이 시커멓고 날카로운 송곳니에 검은 장화까지 신은 저승사자가 어슬렁 어슬렁 자기 식솔들을 짓밟고 다니면서 한올한올 이빨로 뜯어서 씹어먹고 다니는데, 정작 자기들은 땅에 발이 묶여 어디로 도망칠 수도 숨을 수도 없다. 가만히 얌전히 제 살이 뜯겨나가지 않길, 또는 조금만 뜯겨나가길 바랄 수 밖에. 나는 그게 느껴진다. 잔디가 파르르 떠는 그 진동이.
그런데 잔디들에게는 저승사자같은 이녀석이 오늘 갑자기 나한테 와서 뽀뽀를 해댄다. 잔디에 고양이들을 흥분시키는 성분이 있다고 얼핏 듣긴 했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굉장하다. 굉장히 불쾌하다.
게으른 집사놈이 제대로 깎지도 않은 터프한 잔디 위를 걸으며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더니 내 오늘 몹시 피곤하구나.
집사놈아.
들어가서 와인잔에 얼음 2개만 띄워서 가지고 와주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