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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지 Mar 11. 2022

학원 끊고 잠만 자더니...고1 아이의 놀라운 결과

피로, 냉소, 무기력... 사춘기 딸과 갱년기 엄마의 번아웃 극복기

피로, 냉소, 무기력. 이 단어들을 보고 왠지 모르게 친숙한 느낌이 든다면, "어! 내 얘긴데!" 한다면, 당신도 번아웃 상태임이 틀림없다. 각 개인에게, 그리고 좁게는 가족 구성원들에게, 넓게는 현대인들에게 폭넓게 퍼져 있는 번아웃 증후군. 모두 각자 조금씩 번아웃된 상태라고 하지만 우리 집에서 가장 심한 번아웃을 겪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우리 부부와 첫째 딸일 것이다.


우리 부부의 번아웃이야 40대 중반이라는 나이도 그렇고 반복되는 일상 때문이기도 해서 그러려니 하겠지만 우리 첫째의 경우는 조금 걱정스럽긴 했다. 중학교 2, 3학년을 재미없이 집에서만 보낸 탓에(당연히 코로나19 때문이다) 활동량은 줄고, 동기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학원만 다니다 보니 아마도 심리적인 번아웃 상태가 온 것 같다.


말하자면 몸으로 오는 마음의 상태랄까. 마음을 일으키기 어려울 땐 몸부터 일으켜야 하는 법인데, 문제는 이거다. 마음보다 몸을 더 일으키기 힘들어 하는 게 사춘기라는 나이라는 거. 늦가을부터 여러 가지로 힘들어 하는 딸을 보며 고민 끝에 나는 야심차게 겨울방학 동안 학원들을 정리했다.


겨울잠을 자는 아이, 달리는 엄마

            

▲  나의 달리기는 몸에 좋은 운동이라기 보다 마음에 주는 박카스 같았다.


예비 고1이면 남들은 모두 발등에 불 떨어진 듯 학원에 매달릴 시기라는 것은 알지만, 작년 가을부터 영 맥을 못 추는 아이의 번아웃이 마음에 걸렸다. 이제 겨우 열일곱. 아직 인생의 스타트도 안 했는데, 이미 지쳐버린 아이를 대하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어찌 보면 학원을 정리해 주었던 나의 마음은 해병대 입대를 앞둔 아들 엄마 같은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고생이 뻔할 걸 아는 마음이랄까.


그런데 입대(?)를 앞둔 아이는 남는 시간을 모조리 자는데 써버렸다. 간만에 여유가 생겼으니 운동도 하고 책도 읽으면 좋으련만... 자꾸 아쉬워지는 마음을 뒤로하고, 그렇게 아이가 내내 겨울잠(?)을 자는 동안 나는... 이번 겨울, 꽤나 자주 공원을 달렸다. 아이의 번아웃 못지않게 내 마음도 오락가락하는 중이었으니까.


마음이 한계에 달할 때마다 불안과 우울을 털어내기 위한 필살기였던 나의 달리기는 몸에 좋은 운동이라기보다 마음에 주는 박카스 같았다. 말 그대로 발로 펌프질해서 높이는 심박수이지만 그렇게 심박수가 올라가고 혈액순환이 활발해지면 그야말로 몸의 텐션이 올라간다고 할까. 몸의 텐션이 올라가면 마음도 따라 산뜻해졌다.


나의 달리기 코스는 아파트에서 연결된 작은 동산을 건너 공원을 지나 탄천을 달리는 길이다. 나갈 때는 움직이기 싫은 마음과 씨름해야 하지만 일단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서면 게임 끝. 바깥공기를 들이키는 순간 머리가 맑아지기 시작한다.


게다가 집에서 나가는 시간인 오후 4시경은 참 매력적인 시간대이기도 하다. 해가 짧은 겨울이라 4시면 벌써 석양빛이 강해지는데 그 빛을 받은 탄천의 반짝이는 윤슬(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가끔은 그 졸졸거리는 물이 보고 싶어서 달려오는 것인가 싶을 만큼 멈추어서 한참 물멍을 하기도 한다.


좋은 경치는 날 잡아 보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는데, 요즘은 눈 돌려 보이는 사소한 자연의 변화 하나하나가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다. 매일 똑같은 풍경을 보는데도 질리지 않으니 이게 바로 나이가 주는 선물인가 싶기도 하고. 내 다리가 언제까지고 튼튼해서 오래오래 이 즐거움을 가뿐하게 즐길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런데 꼭 달리기뿐만이 아니다. 나를 번아웃에서 매일 건져올리는 일등공신이 또 하나 있으니 바로 나의 새벽 루틴이다.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고, 커피를 내리고, 그날의 신문을 읽는 잔잔한 일상. 적막한 가운데 홀로 보내는 이 시간이 너무 소중해서 나는 다음날 새벽을 기다리며 사는 인간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거창할 것 없는 습관이 참 별것 아니고 사소한 것 같지만 성실하고 꾸준하게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이 어쩌면 내가 일상을 버티게 해 주는 힘인지도 모르겠다. 루틴을 지키는 삶에는 다이내믹한 즐거움이 끼어들 자리가 없지만, 그것이 일상을 단단하게 해주는 힘이라는 것을 아이들도 알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저 잠만 재웠을 뿐인데... 키가?       

▲  아이는 방학 기간 내내 남는 시간을 모조리 자는데 써버렸다.


그렇게 충전된 아주 약간의 에너지로 나는 가끔 딸들을 꼭 끌어안아준다. 이름하여 '엄마 충전'의 시간인데 내 소중한 배터리를 나눠주는 거다. 힘들지만 힘내보자, 파이팅이야, 너는 할 수 있어, 라는 모든 말들을 마음에만 담아두고 팔로 꼬옥 안아주는 일. 방전이 일상이 된 요즘 엄마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인생은 참 예기치 않게 흘러간다. 그렇게 내가 하루치 에너지를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기분 좋게 돌아서는 순간, 문득 쳐다본 첫째의 키가 눈에 띄게 달라진 것 같은 것이다.


어랏, 뭐지? 약간의 의구심과 희망이 뒤섞인 심정으로 첫째의 키를 재보니... 어머나! 무려 2cm가 자라 있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3년 전 키 성장이 멈춘 아이였는데 키가 커버리다니, 진짜 세상에 이런 일이.


겨울방학 내내 푹 재웠더니 돌아온 선물 같은, 뭔지 모르게 기특하고 뿌듯한 기분이다. 키도 컸고 잠도 푹 잔 덕분인지, 개학을 앞두고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핀 아이. 우리 집에 번아웃러 대신 웃수저(주변에 웃음을 주는 사람)가 하나 더 늘었다. 기분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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