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금 이정표가 되어 눈꺼풀을 닫게 한다.
거울을 가만히 바라본다.
더부룩한 머리와 정리되지 않은 눈썹.
눈 밑 그늘은 지평선을 향한다.
이 모습이 미래의 단편임을 알았을까.
눈동자에 반영된 모습이 기억을 되짚는다.
옛 결심, 다짐, 희망이 가느다랗게,
다시금 이정표가 되어 눈꺼풀을 닫게 한다.
축적된 시간과 경험을 추월할 수 있는 요행은 없다. 보통 디자인과를 진학한 전공생들은 고등학생 무렵에 미술을 시작한다. 입시를 마치면 최소 2~4년간 전문화된 교육을 이수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은 가감 없는 디자인이란 환경에 노출된다. 생활에 녹아져 있는 디자인 요소, 이목을 끄는 창의적 발상이나 사용자의 경험을 풍족하게 만드는 레이아웃 등을 감각으로 체득한다. 비전공자가 짧은 시간의 공부나 암기로 따라잡을 수 없는 영역이다. 천부적인 재능은 없기에 센스에 집중할 수 없다. 효용이 바로 나타날 수 있는 기술 개발에 힘을 들였다. 디자인 소프트웨어의 운용을 연마함으로써 쌓을 수 없었던 부분을 메우고자 했다.
과거의 경험은 고리가 되어 현재를 잇는다. 어도비의 프리미어 프로나 애프터이펙트 등의 영상 디자인 툴을 학습하기 위해서는 선행을 요하는 프로그램들이 있다.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레이터 등이 해당한다. 어렸을 적에 호기심으로 배웠던 포토샵은 큰 도움이 되었다. 상당히 많은 시간이 흘러 차이가 컸지만 어도비의 인터페이스는 익숙했다. 이를 바탕으로 툴을 활용하는 것에 있어 조금이나마 수월했다. 하지만 명백한 벽이 눈앞에서 감돌았다.
좌절, 절망과 마주하고 나를 멀리서 바라보는 게 필요하다. 단시간에 필요한 프로그램을 숙지했지만 경쟁해야 할 전공생의 발끝에는 미치지 못했다. 디자인 툴을 잘 다룰 수 있긴 해도 만들 수 있는 작업물의 범위가 달랐다. 표현의 원천이 더 깊고 다양했다. 한계를 인지하고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안이 있었다. 포기하기보다 낙망을 맞대하고 나아갔다. 그리고 내게 부족하고 필요한 점, 목표와 방향을 진단했다. 그들이 쌓아왔던 감각을 닮기라도 해야 했다. 그저 작품들을 많이 보고, 많이 만들기를 반복했다. 이때, 종종 마주치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비관과 의문은 나를 골방으로 내몬다. 초췌한 몰골을 한 채로 바라 왔던 모습인지 되묻기도 한다. 그럼에도 멀리 보고 진전해야 한다. 바로 지금이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만들지도 모를 호기일지도 모른다.
다시금 이정표가 되어 눈꺼풀을 닫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