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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바람처럼 Jan 02. 2024

아버지의 돋보기와 바다

그리운 아버지


아버지의 돋보기와 바다


 이제서야 드는 생각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오로시 내 편이었던 사람은 아버지뿐이였던것 같다. 기억이라는 걸 하는 때부터 지금까지 말이다.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편듦이 없어진지 벌써 5년째이다.


어린 시절 엄마의 부재가 내겐 늘 그리움을 안고 살게 만들었던 것 같다. 엄마만큼 바쁜 사람이 없었다. 하루도 엄마의 밥을 먹어본 기억이 없다. 물론 더 어릴 적엔 모르겠다. 기억을 하고 나서부터다.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한 번도 엄마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엄마도 하루쯤은 평일에 쉴 만도 했을 텐데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지금이야 주말이라 하면 토, 일 이틀이지만, 그때는 토요일도 일하고 학교 가는 시절이었다. 일요일 하루 쉬는 날엔 나는 온전히 엄마의 뒤통수만 바라보았다. 아마도 밀린 잠을 몰아서 주무셨던 것 같다. 그런 엄마에게 "나랑 놀아줘, 나랑 얘기해, 나 좀 봐줘"라며 떼를 쓰는 아이였다면 나는 엄마의 눈길을 잠시라도 받았을까?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자기 할 일 똑 부러지게 하는 그런 딸이었다.

이런 내게 아버지는 무한 신뢰를 주셨다.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어주셨다. 늘 바쁜 엄마 대신 방학 숙제 검사는 아버지가 하셨다. 탐구생활이나 일기같이 매일 조금씩 해야 하는 숙제도 손댈 것 없이 제대로 했던 국민학생이었다. 그러니 아버지의 무한 신뢰는 멈출 줄 몰랐다. 하지만 남동생은 개학 하루 전까지 숙제를 해놓는 적이 없었다. 그러면 방학 전날 나와 아버지의 합동 작품이 탄생되었다. 동생의 일기는 나의 몫이었고, 탐구생활은 아버지의 몫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아버지와 나의 암묵적인 동맹이 어쩌면 아버지가 더 나를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내가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은 다 이뤄주셨다. 피아노를 치는 딸을 위해 어느 날 거실에 피아노를 들여놓아 주셨고, 컴퓨터를 배우니 집에 컴퓨터를 사 오셨다. 그때 우리 집은 그야말로 사촌동생들의 부러움 터였다. 도스 언어를 사용하는 8비트 컴퓨터를 본 적 있는가? input, output 같은 도스 언어로 프로그래밍하던 시절의 컴퓨터였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 나오던 그런 컴퓨터다. 국민학교 6학년 때쯤 우리 집엔 그런 컴퓨터도 있었다.

국민학교 방학 숙제 탐구생활
5학년쯤이었을까?



2015년 여름쯤이었던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열심히 빚을 갚느라 십 원짜리 하나조차도 함부로 쓰지 않고 짠순이 생활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엄마와 아버지는 홍콩 여행을 다녀오셨다. 그리고 내게 내민 아버지의 선물은 핸드백과 지갑 세트였다. 늘 믿고 의지하는 딸이었는데 시집간 후론 얼마나 애쓰며 사는지 아버지는 못마땅하셨을 테다. 그런 아버지는 늘 내게 무언가를 주고 싶어 하셨다. 

그런 아버지의 시간들이 내게는 한없이 고맙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걸 알지 못했다. 언제까지 오래오래 내 곁에 계실 줄만 알았다.



늘 딸이 안타까웠던 아버지의 선물



2016년 봄 어느 날 아버지는 목이 아프시다면 동네 이비인후과에 가셨다. 의사선생님은 바로 큰 병원으로 가보라 했다. 그렇게 아버지는 청천벽력 같은 암 진단을 받으셨다. 평생을 감기조차 앓지 않을 정도로 건강을 자신하셨던 분이다. 그런 아버지에게 림프암이라는 진단이 떨어졌다. 연세도 얼마 되지 않았던 72세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투병생활은 크게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항암약이 잘 맞았고 입맛이 떨어지지도 않으셔서 잘 버티셨다. 엄마의 지극정성 간병도 한몫을 했다. 그때까지도 내게 아버지의 병은 그저 지나가는 감기 같았다. 우리 가족의 일상도 크게 변동이 없었다. 



그렇지만 2018년 초 우린 또 한 번의 벼락을 맞았다. 올케의 발병이 그것이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자마자 유방암 진단을 받았던 올케의 병이 12년 만에 재발되었다. 분가해서 살던 남동생네 가족은 올케가 아프면서 올케의 친정이 아니라 나의 친정으로 들어왔다. 암 환자가 있는 집에 또 한 명의 암 환자를 들여야 했다. 속으로 나는 올케가 참 원망스러웠다. 아버지의 마음고생이 엄마의 몸 고생이 한눈에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그해 가을 아버지는 머나먼 길을 떠나셨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사무실로 찾아와 핸드폰이 안된다며 이것저것 해결하시고 좋아하는 돼지국밥 한 그릇 뚝딱 드시고 집으로 가셨던 아버지가 한 달 사이 마른 거죽에 한 줌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야위셨다. 그럼에도 우리의 일상은 아무 티끌 없이 흘러갔다. 



그 한 달은 아마도 우리에게 이별의 시간을 주려던 아버지의 배려 같은 선물이었던것 같다.

늘 바쁘게 바깥일을 하셨던 엄마가 그 한 달 동안 아버지의 곁에서 오로시 아버지 간병에만 머물러 있었다. 늘 신뢰하고 믿는 딸이지만 살갑지 않은 딸이었던 내게도 딱 하루의 시간이 주어졌다. 엄마를 대신해 하루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와 둘이서 보낼 시간이 주어졌다.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아버지가 한 번도 내게 말한 적이 없었던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찢어지게 가난한 집 오 형제의 맏이였던 아버지는 어린 시절 먹고살기 위해서 바닷가에서 멱을 감았다고 한다. 나는 아버지가 수영을 할 줄 아는지도 몰랐다. 한 번도 아버지와 수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입원해 계셨던 울산대학병원 창문 너머 저 먼 수평선이 보이는 바닷가가 그곳이었단다. 그렇게 두런두런 옛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게 돌아가시기 2주 전이었다. 나는 지금도 저 먼 바닷가 수평선이 보이면 아버지의 그날이 기억난다. 너무나 어리석은 딸이었던 나는 아버지의 시간이 그렇게 빨리 내게서 떠나갈 줄 몰랐다. 핸드폰에 저장된 연락처를 정리해 달라 하셨고, 이렇게 나사가 빠져서 다리가 떨어진 돋보기를 고쳐오라며 내게 주셨다. 이 돋보기는 더 이상 주인이 없다. 아직 고치지도 않고 이대로 간직하고 있다. 고인의 물건들은 다 정리를 하는 게 맞지만, 내게 남아 있는 아버지의 돋보기는 그냥 내 시간이 다할 때까지 함께 있을 것이다. 고칠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냥 아버지에게서 머물렀던 그대로 간직한다.


주인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돋보기


어느새 아버지가 떠나신지 5주년이 다 되었다. 며칠 있으면 아버지의 기일과 생신이 함께 찾아온다. 살아 있는 우리의 시간도 빠르지만 죽은 자의 시간은 더 빠르게 흐르는 것 같다. 딱 10명이었던 친정식구들은 아버지와 올케가 떠나고 8명만 남았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늘 북적거리는 대가족이었다. 그 북적임이 참 반갑지 않았는데 지금은 이 단촐함이 반갑지 않다. 이번 명절엔 큰 아이가 군대에 있어서 그나마 7명뿐이었다. 엄마는 이 식구들도 다 모이지 못하면 어쩌냐고, 우리 막내가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오지 않겠다 하니 아르바이트비 준다고 오라고 하셨다. 

나도 이젠 나이가 들어가나보다. 이해되지 않았던 부모님의 오래된 마음이 자꾸만 온몸으로 느껴진다. 알고 싶지 않은 마음까지도 자꾸만 알게 된다. 아버지의 돋보기와 바다가 사무치게 서글픈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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