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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바람처럼 Jan 03. 2024

영어 필사 700일, 꾸준함에 대하여

 ANNE OF GREEN GABLES

영어 필사 700일. 꾸준함에 대하여


매일 새벽 줌 미팅으로 글쓰기 수업에 참여 중이다. 지난 7월부터 시작했지만, 아주 불량한 회원이었다. 이래저래 핑곗거리가 생겨서 게으름을 잔뜩 부렸었다. 그러다가 10월 4일 꽃마흔 쌤은 파리로 날아가셨다. 쌤의 빈자리를 제자가 지키고 있어야지 같은 조금은 맹랑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또 있잖아 그런 거. 의리. 계실 땐 쪼매 말썽 피워도 안 계실 땐 엄청 말 잘 듣는 그런 스타일인 거, 한마디로 청개구리. 그렇다 나는 청개구리 제자이다.

처음 글쓰기를 시작할 땐 내가 엄청 글을 잘 쓰지는 못해도 매일 쓸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한 20개 정도 쓰고 나니 글감이 없다. 머릿속이 하얗다. 온통 머릿속은 글쓰기 재료를 찾고 있지만, 그냥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쌤이 200일 매일 글쓰기를 하면서 살이 빠지고 울면서 썼다는 말이 실감 나는 날이 머지않은듯하다. 꼴랑 37번째 글쓰기를 하면서 말이다.


6번째 노트, 영어필사 7번째 책 빨강머리앤


영어 필사를 시작한 지 어느새 700일이 되었다. 어제 필사를 하면서 오늘은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는지에 대해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필사를 시작했을 땐 한글책이었다. 논어가 그 첫 번째였고, 다음이 정약용의 아버지의 편지였다. 다음으로 영어 필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영어 필사가 현재 7번째 책 빨강 머리 앤이다. 

즉 9권째 책이다. 논어 필사는 거의 1년 반이 걸렸고, 아버지의 편지 역시 한참 걸렸다. 이유인즉슨, 매일 꾸준히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을 보았다. 영어책을 쓰기 시작하면서는 현재 빨강 머리 앤을 쓰기 전까지는 매일 빼먹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번 책을 쓰면서 성실하지 못하고 있다. 작년 말 한 달을 통째로 빼먹었고, 이번 여름 다리를 다치면서 또 한 달을 건너 뛰었다. 그리고 다시 또 쓴다. 


꾸준함이란 인간이 지키기에 참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좀 더 어린 나이에 이 꾸준함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실천할 마음을 먹었더라면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상상해 본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을 이른 새벽부터 떨어본다.

뒤늦게 꾸준함의 중요성을 깨닫고 뭐든 시작하면 아무튼 끝을 보겠다는 마음으로 행동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자투리 모으기에 대해서도 꾸준히 하고 있음을 기록 중이고, 이렇게 필사도 가끔 게으름을 표시하지만 다시 또 시작하고 시작한다. 

꾸준하다 : 한결같이 부지런하고 끈기가 있다.

한결같이 부지런하고 끈기가 있는 것을 꾸준하다고, 국어사전의 사전적 의미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항변해 본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한결같이 부지런하고 끈기가 있으면 그 사람 너무 힘들지 않겠냐고? 그러니 살짝 쉬어가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걸 꾸준하다고 쳐주자라고~ 나는 이렇게 또 내 맘대로 편의성을 발휘해 본다. 그러니 나는 꾸준함의 대명사가 될 수 있다.


영어 필사를 시작한 날은 2021년 4월 23일이다. 블로그 이웃님의 "같이 필사할 사람 손들어"라는 포스팅에 번쩍 손을 들고 시작했다. 사실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누군가 함께 하는 이가 있으면 더 오래 멀리 갈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셋이서 시작했던 이 필사는 지금 함께하지 않는다. 중간에 흐지부지 다들 바쁜 일상으로 흩어졌다. 그래도 혼자서 하고 있다. 내 필사의 목표는 뉴욕살이를 위한 약간의 노력이기 때문이다. 이 필사를 통해 영어가 완벽해지기를 바라는 게 아니다. 그저 영어라는 언어가 내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지는 순간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700일이 되었다. 영어 필사를 한 날만 700일이다. 시작한 날부터 지금까지 매일은 895일쯤이다. 그러니 195일을 빼먹었다는 소리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하고 있으니 꾸준하다 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영어필사 빨강머리앤


영어 필사를 하다 보니 필사의 좋은 점도 알게 되었다.

손으로 또박또박 글을 쓴다는 것은 손과 머리가 함께 움직인다는 것이다. 천천히 소리 내어 읽어가며 쓰니 영어가 직독직해 되는 순간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이다. 쉬운 문장은 머리에 쏙쏙 들어오기도 한다. 이런 문장은 꼭 기억했다가 써먹어야지라는 생각도 한다. 지금 퍼뜩 든 생각이 '아 그 문장들 따로 메모장을 만들어서 적어둬야지'이다. 그렇다 이렇게 써봐야 생각이 미친다. 따로 만들어 놓으면 나중에 유용하게 쓰일 것 같은데 지금까지 그걸 안 했네. 지금부터라도 하면 된다.

어떤 날은 기계처럼 쓰기도 하고 어떤 날은 한 문장 한 문장 새겨가며 쓰기도 한다. 어떤 날이라도 괜찮다. 뉴욕살이를 하러 떠나는 날까지 아니 그곳에서도 계속할 나의 취미이다.

빨강 머리 앤이 끝나려면 아직 1/3 정도가 더 남았다. 빼먹지 않았다면 지금쯤 끝났어야 하는데 하루의 게으름이 이런 늑장이 되었다. 이미 다음 8번째 책은 정해두었다. 이럴 땐 또 급한 성질이 앞지른다. 다음 책은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이다. 이 책이 지금 무지 궁금하다. 당분간은 빼먹지 말고 열심히 빨강 머리 앤을 마무리해야겠다.


꾸준함이라 말하지만 때론 게으름을 한껏 부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고 있으니 그게 꾸준함이 되는 것이다. 완벽한 꾸준함은 내게 없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는 꾸준함이 있다. 그렇기에 계속 달리기를 하고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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