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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바람처럼 Jan 03. 2024

4B연필 깎던 언니

칼로 깎는 연필의 맛

4B연필 깎던 언니


조금 이른 시간 사무실에 도착했다. 다리가 불편하다는 핑계로 주변 여러 사람을 귀찮게 하고 있다. 서울로 가버린 남편 대신에 친정엄마가 고생 중이시다. 오늘도 역시 내 출근시간보다 1시간은 이른 시간에 사무실에 도착했다. 잘 됐다 싶어 책을 한 권 챙겨 왔다. 휘리릭 읽어버렸던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되도록이면 책에 즐을 긋거나 메모를 하지 않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사실 웬만하면 읽고 난 책은 중고 판매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읽은 책은 잊기가 일쑤다. 그러고는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기억도 못 하고 또다시 책을 구매하는 경우도 있다. 소를 탐하다가 대를 잃는 일이 허다하다. 그래서 요즘은 이렇게 책에 색줄도 긋고 메모도 하면서 읽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낯선 단어들을 마주한다. 한글인데도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단어들이 있다.

네이버 어학사전을 끼고 산다. 나 한국 사람 맞는데...

한갓졌다. 『한갓지다』 한가하고 조용하다.



연필을 찾았다. 심이 몽땅해진 연필을 칼로 깎아낸다. 그리고 문득 생각이 났다. 나  4B연필 깎던 언니였다. 연필깎이에 도로록 깎인 연필보다 직접 손으로 깎은 연필을 더 좋아했다. 여고생 시절 나는 그림 그리던 언니였다. 재능이 있거나 특별히 잘 그리는 학생이 아니라 그저 디자인을 전공해 봤으면 해서 그림을 시작한 여고생이었다. 아주 똥손은 아니었기에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곧잘 그려내는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진 언니였다. 하지만 연필만큼은 기똥차게 잘 깎아내는 아이였다. 미술학원 친구들의 연필을 많이 깎아줬던 것 같다. 손으로 하는 걸 생각보다 잘 하는 나였다.

그렇게 한 겹 한 겹 깎은 연필로 책에 메모를 했다. 한갓지다. - 한가하고 조용하다.



내가 좋아하는 문구류이다.

300원짜리 볼펜이다. 30만 원짜리라도 내 손에 맞지 않으면 좋은 필기구라 생각지 않는다. 사무실 옆 봉사품 파는 가게에서 산 이 볼펜은 내가 요즘 가장 좋아하는 필기구이다. 부드럽고 진하게 잘 써진다.

선호하는 것들이 있다. 볼펜도 꼭 0.7 약간은 굵으면서 진하고 부드럽게 써지는 걸 좋아한다. 샤프 역시 0.5 2B 심을 이용한다. 연한 것보단 진한 심이 좋다.

그 비싼 색연필 세트를 좋아서 사 놓고 잘 쓰지 않고 써보니 내 손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값도 안되는 가격에 중고 판매하고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건 연두색 색연필 한 개이다. 


4B연필 깎던 언니는 고3 때 그림을 그만뒀다. 약간은 허황된 자존심이 꼬라지를 부리는 바람에 디자이너의 길을 포기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런 꿈을 꾸고 있다.

경제적 자유를 이루고 남편과 둘이 세상살이를 하면서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여행 에세이를 쓰고 있는 모습을 꿈꾸고 있다. 학창 시절 그렸던 그림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어디론가 버려졌다. 지금 다시 그림을 그려보려 하지만 참 솜씨는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그냥 그려보고 싶은 대로 그려보는 중이다.


빨강 머리 앤을 찾아서... 란 양국희 작가님의 책을 서점에서 발견하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딱 내가 원하는 책이 서점 가판대에 누워 있었다.

나도 빨강 머리 앤을 만나러 가는 그 길을 이렇게 그림과 함께 에세이로 남겨 보리라 다짐해 본다.

그 시절 꿈이 많았던 여고생은 이제 50을 바라보는 중년이 되었다. 그럼에도 마음속 꿈은 그 시절이랑 별반 다를게 없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그 꿈을 다시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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