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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솔 Feb 20. 2021

있었는데 이제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나는 지독한 야행성 인간이다. 회사 생활을 했을 땐 새벽 2~3시까지 최대한 버티다 아쉬워하며 잠자리에 들곤 했다. 어쩌다 일찍 잠들게 되면 그 시간이 그렇게 아까울 수 없었다. 3년 전 퇴사를 했고 마침내 9시 출근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당연히 취침 시간은 한없이 늦어졌다.


요즘엔 새벽을 넘어 아침에 잠이 들기 일쑤다. 엄마는 생활 패턴을 바꾸라고 잔소리를 하곤 한다. 하지만 새벽만큼 무엇이든 오롯이 집중하게 하는 시간은 없다. 밤에서 새벽으로 접어들수록 분주했던 삶의 발걸음들은 점차 잦아들고 마침내 고요만 남게 된다. 그 정막이 좋았다.


이명이 생기고 지금까지 나를 가장 괴롭게 하는 건 더 이상 고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무음의 상태. 그저 두드리던 키보드를 멈추거나, 듣고 있던 음악을 끄거나, 잠든 내 고양이 옆에 불을 끄고 누우면 당연하게 느낄 수 있었던 고요는 이제 없다. 이게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라는 걸 처음 깨달았다. 주변이 조용해질수록 이명은 집요하게 내 귀를 파고들었다.


공기 같던 고요가 사라지고 나서야 그 존재를 인식하게 되는 유쾌하지 않은 경험을 하게 되는 건 사실 극소수다. 그렇다면 고요를 다른 것으로 바꿔보면 어떨까? 우리의 인생은 수많은 당연한 것들로 이뤄진다. 보고 듣고 말하는 모든 행위에서부터 가족, 반려동물, 집, 친구 너무나 당연해서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마저도 종종 잊곤 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아마 그 빈자리는 생각보다 훨씬 깊고 선명할 것이다. 당연한 것들을 최대한 오랫동안 지켜내는 과정 자체가 인생의 행복일지도 모른다. 상실이 늘어나는 만큼 불행 또한 늘어나는 법이니까.


우리의 일상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지난 일 년 동안 우리는 셀 수 없는 상실을 마주했다. 코로 느낄 수 있는 공기는 한 뼘의 마스크 안으로 제한됐다. 사람들과 멀어진 거리만큼 온기와 활기는 식어간다. 당연했던 일상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래. 살다 보면 전 세계 인구가 일상을 빼앗기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요즘엔 세계여행 프로를 즐겨본다. 코로나 이전에 촬영된 영상을 보고 있으면, 마스크 없이 자유롭게 여행지를 돌아다니던 때가 아득하게 느껴진다.

적어도 일 년에 한두 번 해외여행을 다녀오곤 했는데 재작년 7월 미국 여행을 마지막으로 국제선을 타보지 못했다. 작년 1월에 사이판 일정을 잡았지만, 다리를 다쳐 취소한 것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시 해외로 나갈 수 있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테니. 여행은 차치하고라도 그저 계절이 오고 가는 걸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되길 바라는 요즘이다.


집 마당에 핀 매화꽃. 빼앗긴 일상에도 봄은 온다.


우리 집 마당엔 작은 매화나무 두 그루가 마주 보고 서 있다. 매년 꽃봉오리가 올라오는 걸 보며 봄이 왔음을 느낀다. 얼마 전 벌써 꽃을 피운 매화를 보고 조금 우울해졌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허무하고 쓸쓸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매년 겨울이 되면 강원도에서 스노보드를 타며 원 없이 눈을 밟았다. 한국에서 강원도만큼 또렷하게 겨울을 느낄 수 있는 지역은 없다. 가을부터 시즌권을 구입하고 새 보드복을 준비하며 어서 12월이 오길 기다리곤 했다. 아쉽게도 이번 겨울엔 한 번도 눈을 밟아보지 못했다.


보드를 타기 전에도 나는 겨울을 좋아했다. 코와 볼을 빨갛게 물들이는 차가운 공기에선 겨울 특유의 냄새가 난다. 연말에만 느낄 수 있는 묘하게 설레는 분위기도 있다. 새해를 함께 시작하는 건 언제나 겨울이다. 

어느 것도 온전히 느끼지 못한 계절이 유난히 짧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좋든 싫든 어느새 봄은 성큼 다가왔다. 순간 우울했던 게 미안할 정도로 매화꽃은 조그맣고 수줍게 피어 있었다. 적어도 이 녀석들은 변함없이 마당 한편을 지키고 있다. 언제나처럼 추위가 사그라지길 기다렸다가 활짝 봉우리를 피웠다. 대견하게도 말이다.


그렇다고 '우울한 현실을 극복하고 그 속에 행복을 찾자!' 같은 거창한 감정을 느낀 게 아니다. 우울한 건 그냥 우울한 거다. 그저 봄이면 이쁘게 꽃을 피우는 매화나무가 거기 있다. 그로 인해 내년에도 잠깐 설렐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언제나 변함없는 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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