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발성 난청이 생기고부터 매일 출석 체크를 하듯 이명 환우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모두 돌발성 난청이나 원인 모를 이명을 앓고 있다. 그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 중 하나는 주변 사람들, 심지어 가족조차 그 고통에 크게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고통을 24시간 마주하고 있지만, 이를 타인에게 전달하기란 쉽지 않다. 평범한 이들과 동떨어진 범주에 묶여버린 것 같은 소외감이 든다. 그런 사람들이 인터넷 카페에 모여 서로의 얘기를 나눈다.
이명을 줄이는 방법을 문의하는 글들이 자주 올라오는데 공통적으로 달리는 댓글은 '적응하라'이다. 식이요법과 금주, 스트레스 줄이기 등을 권하기도 하지만, 그나마 현존하는 확실한 이명 처방은 적응이다.
그날 의사가 내게 했던 말은 두고두고 차갑게 떠오른다.
"그냥 적응하세요."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했다. 내 인생의 숱한 부적응 사례 중에 한 줄이 늘어난 것이다.
지금이야 기분대로 말을 툭툭 내뱉는 소심함과는 거리가 먼 부류이지만, 단체 생활을 시작한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4학년 무렵까지 나는 '말 없는 아이'였다. 이게 흔히 말하는 말수가 적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당시 나의 심경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과거로 돌아가는 기술이 생긴다면 그 시절 나를 찾아가 물어보고 싶다. 물론 그 전에 삼성전자 주식부터 사고.
학교에 가면 입을 꾹 다물었고 당연히 친구가 없었다. 반 아이들이 쉬는 시간에 무리를 지어 떠들고 놀 때 나는 주구장창 책만 읽었다. 덕분에 다년간 다독상을 받았고 성적도 꽤 상위권에 머물렀다. 그래서 부모님은 그저 말수가 적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먹는 걸 좋아하는) 아이로 생각했다. 당시엔 학원을 여러 곳 다녔는데, 특이하게 학원에선 말을 했고 친구들도 있었다. 말하자면 선택적 묵언 수행 정도로 볼 수 있다. 이 성격은 아직도 일부 남아있다. 내가 말하고 싶지 않은 상대나 장소, 모임 등에선 놀랍도록 과묵해진다. 학교가 왜 말하고 싶지 않은 장소가 됐는진 모르겠다. 그냥 적응하지 못한 걸지도.
학교에서 친구가 없긴 했지만, 딱히 괴롭힘을 당한 기억은 없다. 너무 예전 일이라 기억에서 지워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담임 선생님에 의한 아주 강렬한 사건은 남아있다. 3학년 때 두 명씩 조를 짜서 과제를 하는 수업이 있었다. 당연히 나는 짝을 구하지 못해 혼자 앉아있었다. 반 인원수는 홀수였고 한 명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담임은 나를 다른 조에 넣어주는 대신 수업 시간 내내 바닥 청소를 하게 했다. 아이들이 걸상에 앉아 과제를 하는 동안, 나는 손걸레를 들고 쪼그리고 앉아 나무 바닥에 왁스 칠을 했다.
10살은 비참함이란 감정을 깨닫기에 그다지 모자란 나이가 아니다. 그걸 그녀도 알고 있었으리라 확신한다.
가시가 일어난 나무 바닥과 독한 왁스 냄새, 걸레를 문지르는 내 손 너머에 보이는 아이들의 발. 어릴 적 기억이 그리 선명하지 않은 편인데도 그 일은 분명하게 떠오른다.
지금이야 이렇게 교육을 빙자한 정신적 학대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지만, 그땐 그저 엄한 교육 방식으로 넘겨질 일이었다. 담임은 내가 처량하게 앉아 바닥을 닦으며 무엇을 느끼길 바랐을까? 적어도 본인보다 30살은 어린 아이에게 그토록 잔인하게 굴 필요가 있었을까? 단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선생이 나서서 부적응자 낙인을 찍을 권리는 없다. 덕분에 과묵하던 초등학교 시절은 그 사건 하나로 불쾌하게 압축되었다.
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겨 다시 말을 하게 되었는진 모르지만, 5학년 때부턴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더불어 성적도 보기 좋게 떨어졌다.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친 같은 반이었던 아이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너 말하는 거 처음 봐."
나는 그 정도로 말이 없는 아이였다. 내가 말문이 트이게 된대 3학년 담임 선생님이 일말의 영향이라도 끼쳤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요"다. 그녀가 내게 남긴 건 그저 서럽게 눈물이 차오르던 기억뿐이다.
그녀만큼 잔인한 방식은 아니어도, 누군가에게 부적응자 낙인을 찍는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사회는 끊임없이 적응을 강요한다. 하지만 그 바람처럼 완벽하게 적응하는 사람은 없다. 있다고 해도, 그저 성공적으로 끼워 맞춰져 보이는 것일 뿐이리라. 우리는 남들보다 덜 적응했다는 이유로 쉽게 낙인을 찍어버리곤 한다. 왕따를 시키고, 숫기 없는 사람을 쉽게 무시하고, 사회성이 부족한 동료의 험담을 늘어 놓는다.
홀로 산에 들어가 묵언 수행을 하지 않는 이상, 좋든 싫든 타인을 마주하고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외향적이고, 쾌활하며 친절한 인간을 목표로 할 의무는 없다. 모두가 열광하는 인싸의 범주 밖엔 수많은 아웃사이더들이 존재한다. 본인을 '아싸'로 칭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들이 동경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는 건 사실이다.
'말 없던 아이' 시절을 제외하면 나는 어느 정도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결코 외향적이고, 쾌활하며 친절한 인간은 아니다. 사실 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남들에게 주목받고 싶어 하던 때도 있었지만, 점차 그런 노력에 피로감을 느꼈다. 나이가 들수록 인간관계가 점점 좁아진다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나 역시 공감한다. 나는 직설적이고, 불친절하며, 감정적이다. 지금 내 주변에 있는 이들은 고맙게도 내 성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준 사람들이다.
설령 주변에 한 명도 없다 한들, 그 인생을 실패한 부적응자로 치부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내 3학년 담임 선생에게 묻고 싶다. 그래서 당신은 지금 얼마나 완벽하게 적응해서 살고 있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