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쓸모> -최태성-
과거보다 현재나 미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과거는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불 킥을 시연하는 어리숙한 시간들일 뿐이다. 더러 칭찬받거나 좋았던 추억이 있지만, 그건 그것대로 간헐적으로 차를 마시듯 우려 마시는 용도로 사용 중이다.
학교 다닐 때 역사 시간에 내내 졸았던 기억이 있다. 옛날 이야기 하듯이 재미있게 가르치기로 유명했던 선생님이셨는데, 처음부터 흐름을 놓쳐서였는지 정신을 못 차리고 꿈속을 헤맸다. 시험은 벼락치기로 달달 외워서 평균치의 점수를 받았다. 시험이 끝나면 외웠던 내용은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내게 역사는 자신 없는 과목이다.
역사의 쓸모는 어쩌면 나를 위한 책인가 보다. 과거가 뭣이 중헌디. 역사는 배워서 어디다 쓸까? 하는 마음을 꿰뚫어 보듯이 역사의 쓸모에 대해 하나씩 짚어가며 설득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내 안에서 질문이 올라올 때. A와 B의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상황일 때. 체면과 실속 중에 무엇을 택해야 할지 고민일 때. 역사는 하나의 지침서가 될 수 있을 꺼라 말한다.
이 책은 2년 전에 한번 읽었었다. 이번엔 오디오북으로 다시 들었는데, 어쩜 이리 새로운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서 눈으로 읽는 것과 귀로 듣는 것의 차이가 아닐까 핑계 대고 싶을 정도다. 서평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게도 해주었다. 역시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귀로 들으니 더 빨리 완독 할 수 있는 반면, 몰입하지 않으면 금방 흐름을 놓치기 일쑤였다. 눈으로 보는 것에 비해 휘발되는 시간이 좀 더 빠르게도 느껴졌다.
두 가지를 기억하고 싶다.
첫째는 박상진 독립운동가의 발견이다. 36세의 젊은 나이에 순교한 독립운동가이다. 판사에 합격하고서도 사표를 던지고 험한 길을 택한 위인이다. 부귀영화가 기대되는 길을 버릴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잘 모르는 사람이라 검색 창에 인물 조회를 해본다. 박상진의 사형이 집행되고, 사후에 남겨진 가족들의 불행하고 가난한 삶도 같이 나온다. 다른 독립운동가들처럼 병과 가난에 힘겨운 생을 이어가는 아버지와 아내, 자식의 이야기에는 화가 나기까지 한다. 이 놈의 나라는 왜 이럴까? 나조차도 '박상진' 이름 석자도 몰랐으니 반성하며, 이번 기회를 통해 기억해야지 다짐한다.
둘째는 "왜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태극기를 들고 광장에 나왔을까" 그 챕터다. 이해가 안 되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던 어르신들의 행동과 외침이 저자의 설명을 듣고는 그럴 수 있겠다 하는 마음이 되었다. 최근에 법륜 스님의 <야단법석>을 읽었는데 두꺼운 책 한 권을 관통하는 큰 주제와도 닮아 있다. 상대가 잘못해서, 나와 생각이 달라서, 나를 괴롭게 하는 누군가로 인해 인간관계에 갈등을 겪는 상황이 종종 있다. 상황이 해결되기 전까지 내내 스트레스와 고통에 시달린다. 스님은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하라고 한다. 내가 고통받는 이유는 내 문제이지 상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상대를 탓하지 말고 내가 보는 관점을 바꾸면 된다. 앞만 보던 것을 뒷면도 보고 왼쪽, 오른쪽도 다양하게 보라는 얘기다. 태극기 부대의 어르신들도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온 생을 부정당하고 공격받는다고 느낀 단다. 내가 살아온 생의 전체가 잘못되었다고 하면, 억장이 무너지고 억울한 일이다. 그럴 수 도 있겠다 싶다. 내 부모 조부모의 관점이기도 하다.
역사는 결론을 이미 알고 있는 사건들이다. 같은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만약에 나라면...?" 하고 견주어 상상하는 일이다. 시대가 다르고 환경과 교육 수준이 차이가 난다. 현재기준으로 지키고 싶은 게 많아진 나는 자신이 없다. 타인이나 국가를 위해 희생하거나 용기 내고 싶지가 않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나 자신을 희생했던 역사 속 위인들이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평소에 현재와 미래가 중요하단 생각을 했었는데, 생각과 행동이 멍 때릴 때 역사 속 인물이 도움이 될 거 같다. 역사를 기억하고 배워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