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
앞을 못 보는 사람이 밤에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한 손에는 등불을 들고 길을 걸었다.
그와 마주친 사람이 물었다.
"정말 어리석군요. 당신은 앞을 보지도 못하면서 등불은 왜 들고 다닙니까?"
그가 말했다.
"당신이 나와 부딪히지 않게 하려고요.
이 등불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 한상복의 <배려> 중에서 -
여덟의 자식을 낳아 기른 친정엄마는 일평생이 남을 위한 삶이었다.
남편을 위한 삶이었고, 자식을 위한 삶이었다.
무릎관절이 말을 안 듣은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타인을 위한 삶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딸들의 자식을 봐주는 일이다.
첫 손주가 태어나고 좀 수월할 만하면 두 번째 손주가 태어나고 다시 쉴만하면 다른 동생이 아기를 낳았다.
여덟의 자식에 다시 손주, 손녀 여덟이 엄마의 손을 거쳐갔다.
또 다른 손녀의 탄생이 예정되어 있다.
애를 봐줘야 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직장에서 일하는 딸이라, 전업주부인 딸은 육아와 살림이 서툴러서 봐줘야 한다.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유는 매번 다르지만 대외적인 명분일 뿐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시키는 일이다.
“엄마, 어디가? 우리 1층 가야지? 왜 이거 눌렀어?”
타인을 위한 삶은 사람이 아니라 기계에도 적용된다.
아파트에서 살아온 생활이 20년은 족히 되었는데, 여전히 엘리베이터 버튼을 헷갈려하신다.
내가 가야 할 방향으로 버튼을 눌러야 하는데, 기계가 움직일 방향을 생각해서 버튼을 누른다.
친정엄마는 1층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엘리베이터가 1층에 있다면
기계는 11층까지 올라와야 하므로 엘리베이터를 올라오는 버튼으로 부르는 것이다.
이타적인 삶을 살아온 부작용이 아닐까.
형제들끼리 한바탕 웃으며 에피소드를 공유했지만, 마음 한편은 짠하니 시렸다.
이젠 당신을 위한 삶을 살아도 되는데 여전히 자식들 걱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다'는 옛말을 떠오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