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아들은 초등 6학년이다.
느긋하고 약간 늘어지는 휴일이다. 엄마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고 싶어 하는 아들에게 office에서 흔한 '상사-부하', '갑-을' 흉내를 좀 내봤다. 부하가 올린 기안을 한 번에 통과시키지 않고 한번 reject를 놔주는 센스(?)를 발휘해 조금 애를 태웠다. 아들도 게임은 무척 하고 싶으나 엄마의 승인이 없으면 안 되니 최대한 비위를 맞춰준다.
내가 요구한 내용은 게임을 하기 위해 엄마를 설득시켜보라는 거였다. 설득하기 위한 도구로 딱딱한 노트를 결재판처럼 하고, 그 위에 깨끗한 A4지 한 장을 내밀었다. 말로 설득하지 말고 글로 써오라고 주문했다. 세로로 반을 접은 종이 왼쪽과 오른쪽에, 장점과 단점을 나열해서 아래와 같이 적어왔다. 처음 한 번은 좀 성의 없게 대충 적어와서 반려처리를 했다.
"상사한테 보고서 가져가면 보통 두세 번은 수정할 각오를 해야 해. 한 번에 통과하는 일이 잘 없거든"
'회사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심어주는 건 아니겠지?' 하는 문장이 짧게 떠올랐지만, 사회에 나오면 치사하고 자존심 상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보고서 반려' 쯤이야 애교에 속할 거라는 생각이 더 우세했다.
장점
1. 난 아직 초등학생이다.
2. 오늘은 주말이다.
3. 너무 열심히 하면 지쳐 정작 중, 고등학교에 가서 공부를 못한다.
4. 현재 심심하다.
5. 할 것을 다했다.
6. 재미있다.
단점
1. 내년엔 중학생이다.
2. 나와 약속했다.
3. 내일은 시험이 있다.
4. 시간을 버리게 된다.
5. 좋지 않다.
장점을 1개 더 많게 써왔다. 머리를 좀 쓴 것 같다.
두 차례에 걸쳐서 올린 제안서에 최종으로 결재해줬다. 더 애태우면 인내심의 한계가 올 것 같았다. ㅋㅋ
결과 : 조건부 승인 (최대 2시간 허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