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제이 Jul 08. 2017

84 착각

                                                                                      

아들이 훌쩍 커버렸다. 첫걸음을 떼고 뛰어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엄마', '아빠' 발음을 하며 짧은 문장을 말하던 아이가 멀지 않은 기억 속에 있는데 고등학생이 되었다. 지나고 보니 찰나 같은 시간인데 십수 년이 지나있다. 


나는 운이 좋았다. 아이가 세 살까지는 친정엄마가 그 이후부터는 시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키웠다. 도움을 넘어 회사 다니는 나를 대신해 두 어머니가 육아를 책임져 주셨다. 아이 여럿을 길러본 베테랑들의 손에서 공짜로 아이를 키운 셈이다. 주말에만 엄마 노릇을 하는 나를 아이는 다행히 잘 따랐다. 에너지가 많긴 했지만 아이도 순한 편이었다. 산만하고 짜증이 잦고 말을 안 듣는 아이였다면 아무리 외할머니, 친할머니라도 힘드셨을 텐데 주연이는 순한 손자였다. 어머니들은 몸은 피곤하지만 말 잘 듣는 손자를 키우는 일을 행복하고 즐거운 일로 여기셨다. 


지난 기억을 잘 잊는 편이다. 감정을 크게 흔들 만큼의 사건이나 충격이 아닌 이상 기억에 오래 남지 못한다. 평소에 뭔가를 끄적이는 이유는 그날의 기억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다. 기억에서 사라질 잊히는 순간을 기록으로 남겨두고 추억하고 싶어서다. 건망증이 심한 것에는 장, 단점이 있는데 나쁜 기억이 생각 안 나는 대신, 좋은 기억도 사라진다는 점이다. 


아이가 어릴 때는 몸이 힘들었다. 늘 졸리고 피곤했고, 항상 바빴다. 일하고 집에 오면 아이를 케어하고 집안일도 해야 했다. 주말이면 에너자이저 아들을 데리고 가까운 곳이라도 나들이를 가야 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순간은 행복이지만 긴장과 피로도 함께 왔다. 높은 데나 위험한 곳에라도 갈라치면 말려야 한다.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아이의 안전을 감시해야 한다. 그런 것들이 피로를 유발했고 집에 가면 언제나 녹초가 되곤 한다. 그런 기억을 다 잊고 있었다. 아들에 대한 기억은 육아일기에 쓴 어록과 재미있는 일화의 단편적인 기억들이다. 좋은 기억, 행복한 기억 일색이다. 힘들고 피곤했던 더 많은 일상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렇게 작정하고 구체적인 피로를 생각해내면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힘든 기억은 불러오지 않고 좋은 기억만 반복적으로 회상하며 행복해한다. 그런 회상은 나를 종종 착각하게 한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다시 주어진다 해도 잘 할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다. 아이의 뒤를 쫓아다니며 안전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지금은 편안해진 내 몸이 그런 착각을 하게 한다. 아이와 친구처럼 지내며 키울 자신, 마음껏 사랑할 자신이 넘친다. 품에 쏙 안기는 조그만 아이를 안아 서로 장난치는 모습을 상상한다, 작은 머릿속이 궁금해 사소하고 다소 황당한 질문을 하곤 했던 일상을 떠올린다. 왜곡된 기억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 잘 키울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한다. 


아이가 잘 자라준 데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가 필요하다. 순하고 똘똘한 아이와 사랑으로 길러줄 신뢰의 양육자, 편안한 환경의 집안 분위기 등 여러 가지 것들이 조화롭게 섞여야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좋은 인성을 가진 아이로 자랄 수 있다. 


사실은 그런 좋은 타이밍과 조건이라면 어떤 부모라도 어렵지 않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 

옛날 어느 연예인의 수상소감처럼,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하나만 얹으면 쉽게 완성되는 결과다.

매거진의 이전글 82 Office 놀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