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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ㄴㅈㅇ Jun 10. 2018

무엇인가를 제대로 '본 다'는 것

『시』 이창동

영화 「시」는 주인공인 ‘미자’가 시 한편을 쓰게 될 때까지의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심오하여 감상하는 사람마다 꽤 다양한 평이 나오겠지만, 저는 ‘왜 미자만 유일하게 시를 쓸 수 있었나’ 하는 의문이 가장 많이 들었습니다. 20명 남짓 수강하는 문학 강좌에서, 이전에 시를 써봤던 경험자도 있는데 왜 미자만 시 쓰기에 성공할 수 있었는지, 왜 그렇게 연출했는지가 가장 궁금했습니다. 이창동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극 중에서 미자는 ‘행동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미자가 처음 문학 강좌 포스터를 보는 장면의 편집은 이상하게 보입니다. 그녀는 버스에서 내려 포스터를 응시하다 고개를 돌려 집으로 걸어갑니다. 그리고 다시 포스터를 비춥니다. 일반적인 영화였다면 카메라의 시점은 고정시킨 채 미자가 스크린 밖으로 사라지고 난 후, 포스터를 비추어 미자가 무엇을 보았는지 정보를 전달하는 식으로 편집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카메라의 시선은 포스터에서 눈을 뗀 미자가 아파트 입구까지 걸어가는 장면까지 따라갑니다. 미자가 프레임에서 거의 사라질 때 쯤 포스터를 비춰주는데, 이는 문학 강좌 포스터를 본 것이 미자 뿐만이 아니라 버스에 오르내리는 많은 사람들이 보고 지나쳤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일반 영화였다면 아래 사진 중 3번째 장면이(왼쪽 하단)이 필요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는 이 장면이 가장 길게 편집되어 있는 이유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즉, 문학 강좌 포스터는 누구나 흔히 볼 수 있는 전단지이지만 버스정류장을 오갔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이 전단지를 보고 수업을 들으러 간 사람은 미자 밖에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는 영화의 결말에서 수강생 중 유일하게 시를 쓴 사람이 미자라는 것을 미리 가리켜 주는 전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미자는 영화 진행 내내 창작과정에서 무력감을 느낍니다. 그도 그럴 것이 미자는 한 번도 제대로 무엇을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미자는 중반부에 가서야 자신의 병명을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그녀는 이전까지 자신의 환부가 운동부족으로 인한 단순 결림인지, 알츠하이머인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의사의 진단에 항변도 해봅니다. 동백꽃의 아름다움에 대해 일장연설을 펼쳐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저거 조화에요’라는 의사의 핀잔입니다. 아마 이 장면에서 미자도 조금씩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문학 강좌 시간에 들었던 것처럼 무엇인가를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고 그저 겉모습만 예뻐하고 바라보고 있던 자신을 말이죠. 그녀가 시인의 자질이 있다는 근거로 매번 자랑스레 언급되었던 꽃, 하지만 그 꽃의 아름다움마저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가 바로 그녀가 처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겉모습의 아름다움만 찾으려고 하는 그녀는 행동은 미(美)에 대한 그녀의 철학뿐만 아니라 그녀의 옷차림, 행동, 말투 곳곳에 배여 있습니다. 작 중에 그녀는 나이에 맞지 않게 옷을 화려하게 입고 다니며 목소리 또한 과하다 싶을 정도로 나긋나긋합니다. 하지만 그녀를 현실물정 모르고 허영심에 가득 찬 인물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느낌입니다. 제가 보기에 그녀는 자살한 희진처럼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살아온 인물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의 아름다웠던 순간’을 말하는 장면에서 미자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조명을 받지 못한 채로 등장합니다. 나아가 다른 사람들은 부모(할머니), 자녀(출산), 재물, 사랑, 자연 등과 같은, 인간사에서 한번쯤은 행복을 말할 때 등장하는 것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반면 미자는 언니가 자신을 불러줬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이는 미자가 그녀의 언니를 각별히 생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자가 말했던 ‘맨 처음 기억일 것 같아요’라는 말이 못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여러 기억 중 하나를 꼽아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이라고 말하는 반면, 미자는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기억을 행복한 순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미자에게 있어서 최초의 기억 이후에 추억들은 모두 어떻다는 것일까요. 영화에서 가장 크게 비어있는 부분이기도 한 미자의 인생은, 이혼한 딸과 따로 살면서 손자를 키운다거나, 의지할 사람 하나 없는 상황을 미루어 짐작해 봐도 그리 좋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극 중 유일하게 이 장면에서 미자의 얼굴에 진하게 그늘이 드리우는데 이는 그녀의 과거가 굉장히 불행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미자의 화려한 옷차림이나 허영 가득한 목소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옷을 굉장히 화려하게 입는 사람들은 실제로 그 내면이 비어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증명된 것처럼 황량한 자신의 내면을 겉의 치장을 통해 가리는 것이겠죠. 저에게는 미자가 그런 사람처럼 보입니다. 과거의 고통스러운 삶을 외면하고자 외모나 행동, 꽃 등을 통해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찾지만 미자는 손자의 범죄를 알게 되면서, 희진을 알게 되면서, 그리고 시를 써야 되기 때문에, 즉 눈앞에 목도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할’ 상황에 처하게 되자 주저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미자에게 놓은 현실은 처참합니다. 성폭행 가해자 학부형들 그 어느 누구도 죽은 희진을 위한 애도의 시간을 갖지 않습니다. 자살의 구체적인 이유에 관심을 두지 않으며, 미안함이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아가 합의 과정에서 진실을 폭로할 것이라 생각했던 기자가 오히려 합의로 이끄는 모습은 언론에 대한 감독의 쓴소리처럼 느껴집니다. 결국 미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희진을 잊은 채 하나의 동질적인 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도 희진이를 ‘보려’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녀의 흔적까지 말끔하게 씻어 내버리려는 사람들 속에서 미자만이 희진이를 진짜로, 제대로 ‘보기’ 위해 노력합니다. 시상은 찾아오지 않으며 내가 가서 빌어야 하고 사정을 해야 한다는 김용탁 시인의 말은 미자에게 행동이 되어 그녀의 ‘주변’, 지금 그녀가 서 있는 자리에서 남겨진 희진을 생각합니다. 성폭행을 당했던 과학실을 들여다보는 미자의 표정은 마치 성폭행 장면을 목격하는 것처럼 공포에 질려 있으며, 이는 그녀가 진짜로 ‘보고’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시 쓰기를 두려워합니다. 결국 자신이 희진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손자의 죄를 먼저 폭로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김용탁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슴 속 시가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를 ‘가둬두고 있는’ 종욱에 대한 이중적인 감정을 털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 때문에 우세요? 시를 못 써서?”라는 경찰 박상태의 질문은 “종욱이가 저지른 죄 때문에 우세요? 종욱이의 죄를 폭로할 수 없어서?”라는 윤리적 문제로 읽혀집니다.



김용택 시인은 시를 쓰려면 세상을 잘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미자는 처음엔 식탁에 놓인 사과를, 집 앞에 선 나무를, 죽은 소녀의 사진을, 희진 학교 교실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린 소녀가 그 짧은 생을 내던졌던 검은 강물을 진지하게 들여다봅니다. 그러고 기다립니다. 그러고 비가 떨어집니다. 빗방울이 종잇장에 후두둑하며 세차게 시 한편을 적어내리는 것 같습니다. 관객에게도 미자의 시점쇼트를 보여줌으로써 시인의 자리에 앉아 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미자는 용기를 내어 손자의 죄를 고발하고 비로소 시를 쓰게 됩니다.


결국 이 영화는 시를 쓰기 위해 꽃을 바라보고 아름다움을 쫒으려 했지만 결국 보고 싶지 않았던, 자신이 겪었던 고통, 혹은 타인의 고통을 피하지 않고 관통함으로써 각성하게 된 한 인간의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자연의 아름다움 같은 것들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고통을,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을 우회 없이 대면하고 관통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김용탁 시인이 ‘시가 죽었다’라는 말이 제게는 ‘보려’하지 않는 세상, 윤리나 도덕이 바로서기 힘든 세상을 지적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그 말이 저에게 하는 말처럼 들려서 영화의 막이 내리고도 한참이나 씁쓸한 물음표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과연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일까. 하는 두려움 섞인 의문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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