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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ㄴㅈㅇ Oct 26. 2018

사랑을 강요하는 사회

『더 랍스터』 요르고스 란티모스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 영화의 생소한 전개에 당황하며 이런 질문을 던졌을 것 같습니다. 커플이 되지 못하면 동물로 변한다는 설정부터 배경음, 장면 연출까지 기존 대중영화의 문법과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문학에서 사용하는 그것과 궤를 같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굳이 비슷한 영화를 떠올려보자면 수용소에서 시스템의 폭력을 경험한다는 내용인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가 떠올랐으나, 중반부 이후 숲으로 탈출하면서부터 이 영화는 종잡을 수 없게 흘러갑니다.


「더 랍스터」는 로맨스물로 분류됩니다. 표면적으로 ‘진정한 사랑은 무엇인가’에 대해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에게 「더 랍스터」는 그저 블링블링한 로맨스물이 아니라 독특한 세계관과 역설적인 유머를 가진 농도 짙은 블랙코미디처럼 보입니다. 거기다 흑백논리, 전체주의 등의 불합리한 통념에 대해서도 깊게 다루고 있는 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감독이 꽤나 영리한 선택을 했다는 생각도 들어요. 타선에 들어선 타자들이 직구보다 변화구에 어려움을 호소하듯, 사회 문제를 진지한 어조로 다루는 것보다 우회적으로 풍자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고 적절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두둠칫



우리 사회의 통념에 하이킥을     


「더 랍스터」의 세계관은 기괴합니다. 사람을 납치하듯 끌고 와서는 커플이 되지 않으면 동물로 변한다니요. 하지만 관객이 「더 랍스터」의 세계관을 완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주인공인 데이비드는 이미 그러한 조건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마치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가 자신이 벌레로 변한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처럼요. 그래서 데이비드에게 ‘왜 처음부터 호텔을 뛰쳐나가지 않았어!’라며 부조리를 지적하기보다는, 데이비드와 주변 인물들의 행동에 집중하는 것이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포착하는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사회의 규칙은 명확합니다. 혼자가 된 인간은 45일 이내 짝을 이룰 것. 그리고 짝을 찾지 못하는 인간은 동물이 된다는 것. 얼핏 보면 터무니없는 조건이지만 인간과 동물을 병치시켰다는 것이 의미심장하게 들렸습니다. 생각해보면 ‘짝짓기’는 인간을 포함하여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의 기본적 본능이자 욕망입니다. 사람이고 동물이고 간에 일정 연령에 도달하면 짝을 찾아 새끼를 낳고 가정을 이루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었습니다. 다만, 동물이 아닌 인간에게 있어서 짝을 만난다는 것, 가정을 이룬다는 것, 그 자체는 삶의 여러 선택지 중 하나일 뿐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지요. 호텔에서는 이러한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솔로인 객체는 짝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입시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일들은 동물에게만 가능한 일이겠죠.


커플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


‘짝을 이루어야 한다’는 규칙이 현실에서도 존재한다면 어떨까요? 우리네 상황을 살펴보면 사실 「더 랍스터」의 세계관과 크게 다를 것 없어 보입니다. 2016년 행정부에서 발표한 '가임기 여성지도' 사건이나, 1인 가구 싱글세 관련 논란 등은 비록 여론의 뭇매를 맞고 사그라들기는 했지만 「더 랍스터」의 규칙이 우리 사회 저변에도 깔려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최근 흥행했던 '미운 우리새끼'의 경우 노총각 연예인들이 출연하여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미운' 오리새끼가 될 충분한 이유가 되는 걸까요? 커플 메이킹 호텔과도 같은 '애정촌'에 출연해서 상대방에게 구애하고, '우리 결혼했어요'에 출연하여 거짓으로라도 커플 행세를 해야만 하는 걸까요? 약간의 자유도가 부여되었을 뿐, 우리가 즐겨보는 커플 메이킹 예능의 기본 골격은 「더 랍스터」의 호텔의 규칙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이쯤에서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우리 사회 저변에 ‘짝을 만나야만 한다’는 정언명령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는 일정 나이가 넘으면 ‘결혼 언제 해?’라는 말을 듣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문화가 존재합니다. 오랫동안 연애를 하지 않는다면 뭔가 문제 있는 사람처럼 보는 시선도 더러 있죠.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서양의 통념이라고 봐도 무리없을 정도입니다. 최근 혼밥, 혼영이라고 하며 싱글세대를 지칭하는 단어와 문화가 생겨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혼자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혼자 무엇을 한다는 것은 다소 용기가 필요한 일 일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사회의 시선을 보고 있자면 사랑을 강요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란티모스 감독은 ‘짝을 이루지 못하면 동물로 변한다’라는 세계관을 통해 사회의 불합리한 통념을 비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회가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짝을 이루어야 한다’는 명제는 사실 동물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게 아니냐며 항변하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혼자임을 선택할 권리도 지녔다’라는 것을 영화 전반에 걸쳐 주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보면 「더 랍스터」를 통해서 란티모스 감독이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까지 자연스럽게 혹은 조금 불편해도 애써 무시했던 사회적 통념들을 ‘커플 메이킹 호텔’이라는 밀봉된 문학적 실험실을 통해 진위여부를 가리려는 시도로 읽혀집니다.     


하지만 란티모스 감독은 '혼자됨'이 무작정 좋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후반부에 데이비드는 숲으로 도망갑니다. 인테리어까지도 데칼코마니처럼 짝을 이루고 있던 호텔과는 달리 솔로부대가 거주하는 곳은 개별성을 강조하듯 홀로 솟은 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진 숲으로 연출됩니다. 호텔에서 도망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환영하며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것 같지만 솔로부대 역시 규칙이 있습니다. '결코 커플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 사실 솔로부대는 겉으로는 자유로워 보이지만 사랑을 강제로 억제한다는 점에 있어서 호텔과 다를 바 없는 곳입니다. 개별성 강조를 극단으로 밀어붙였을 때 나타나는 병폐, 호텔에서 행해지는 폭력이 정반대로 전도되어 현상되고 있는 장소가 숲 입니다. 결국 데이비드가 '개별성을 허락하지 않는 집단'을 거부한 끝에 도착한 곳은 '개별성만을 허락하는 집단'이었던 것입니다. 호텔에서는 의무적으로 짝을 이루어 의미 없는 블루스를 췄다면, 숲에서는 일렉트릭 음악을 듣는 인물들의 과장된 몸짓을 통해 역설적으로 처철함과 결핍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아가 호텔에서 인간사냥을 했던 것처럼 솔로부대에서는 이른바 ‘작전’이라며 커플 브레이킹을 시도합니다. 늦은 밤을 틈타 호텔에 잠입하여 커플들에게 찾아가 연인의 거짓이나 관계의 불신을 심는데 매진합니다. 하지만 설령 동물이 되는 것이 두려워 거짓으로 시작되었다 할지라도 관계를 쌓아나가며 생겨난 감정들을 모두 거짓이라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무 자르듯 어디까지가 진실된 감정이고 어디까지가 꾸며낸 감정이라 말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예가 한 커플의 아이로 대변되고 있습니다. 


즉, 호텔에서 욕망을 가지라고 주입시키는 것이 문제라면 관계에서 생겨난 감정 모두가 허구라고 부르짖는 솔로부대의 입장 또한 문제가 있습니다. 호텔이나 솔로부대나 전체주의에 물든 집단으로, 개인의 자유의지와는 무관하게 집단적 억압을 통해 개별성을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란티모스 감독은 이를 호텔과 숲의 대비를 통해 ‘짝을 이루어야 한다’, '철저히 혼자여야 한다' 라는 전체주의적인 정언명령을 걷어차 버리고 있습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아이의 존재는 시스템의 수호자처럼 보입니다


흑백논리의 경계선에서     


데이비드는 호텔에 온 도착한 순간부터 ‘모 아니면 도’ 식의 선택을 강요받습니다. 이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 신발크기가 44인지 45인지 등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마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 중간 어디쯤...’이라는 말은 통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이분법적으로 나뉩니다. 영화의 큰 주제를 놓고 보아도 ‘사랑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 ‘짝을 이루느냐, 이루지 않느냐’로 나뉩니다. 물론 이러한 흑백논리는 후반부 데이비드가 솔로부대에 가서도 적용됩니다.     


극 중 데이비드에게 큰 변곡점이 되었던 선택지 중 하나는 비스킷녀 vs사이코패스녀(이하 사코녀) 사이의 선택입니다. 비스킷녀가 상징하는 것은 아마도 ‘마음에도 없으면서 좋아하는 척’ 일 것이며, 사코녀가 상징하는 것은 ‘좋아하면서 좋아하지 않는 척’ 일 것입니다. 강요된 선택에 내몰려진 데이비드는 후자를 선택하게 되지만 좋지 못한 결말을 맞게 되죠. 애초에 「더 랍스터」의 세계관 자체가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도록 짜인 각본처럼 느껴집니다.      


흑백논리가 느슨하게 작동하는 유일한 장소는 역설적이게도 커플 메이킹 호텔입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장소를 종교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유죄인 도시를 천국, 사랑하면 유죄인 숲을 지옥으로 보다면, 사랑을 훈련하는 호텔은 영혼이 죄를 씻고 천국으로 가기 위해 일시적으로 머무르는 연옥(purgatory)입니다. 물론 싸코녀처럼 타인을 지옥에 떨어뜨림으로써 지옥행을 유예할 수 있지만, 이는 결코 제3의 선택지가 될 수 없습니다. 싸코녀 또한 일정기간 유예를 받았을 뿐, 천국과 지옥 사이를 좁혀가며 달음질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천국(도시), 지옥(숲 속)이 아닌 연옥(호텔)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것은 대단히 훌륭한 구성처럼 보입니다. 호텔은 도시와 숲 속의 경계에 속하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그 경계에 선 인간, 양쪽 모두를 바라보는 인간만이 통찰력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데이비드가 주인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그 존재에 대하여          


모든 잡지, 광고, 영화, 토크쇼에서는 관계에 대한 조언을 끝없이 퍼부어대며 그 정점으로 ‘사랑’을 내세웁니다. 모든 감정이 아스라지고 부질없어 보이는 이 영화에서도 진실한 사랑이라고 느낄 수 있는 장면은 있습니다. 데이비드가 근시녀와 수화를 주고받는 장면은 그 어느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베드신처럼 보입니다. 세상 모든 사랑이 금지된 곳에서 오롯이 몸짓으로 그들만의 언어를 만들어내고 사랑을 표현하는 장면은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진실한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종반부 데이비드는 또다시 선택을 강요받습니다. 나의 눈을 희생해서 근시녀와 커플이 될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도망칠 것인가. 영화는 결말을 보여주지 않은 채 끝을 맺습니다. ‘영원한 사랑’이라는 환상을 위해 근면하게 복무하며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실재를 깨닫고 다시 혼자가 되어 자유롭지만 고독할 것인가. 어느 것을 택할지는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란티모스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하고 싶은 거겠죠. '당신은 어떤 사람 입니까?'   


랍스터란 단어를 urban dictionary에 찾아보니 대략 ‘천생연분’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랍스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영화에 등장하는, 서로 천생연분이라 믿었던 수많은 커플들은 서로에게 랍스터였을까요?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포스터는 조금 씁쓸해 보이기도 합니다. 상대방을 안고 있는 모습이지만 결국 나 자신만 부각되는 사진으로, ‘상대방을 사랑하는 건지’, 혹은 ‘상대방을 사랑하는 내 모습을 사랑하는 건지’에 대한 물음이 짙게 깔리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노래가 끝나고 잔잔하게 바닷소리가 들려옵니다. 데이비드는 근시녀와 사랑을 이어나갔을까요. 아니면 랍스터가 되었을까요. 어쩌면 둘의 공통점을 근시로 설정한 것도 결국 상대의 진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는 함의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에 어쩐지 개인적으로는 영화의 결말을 해피앤딩으로 추측하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데이비드는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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