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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ㄴㅈㅇ Feb 07. 2019

난봉꾼의 변(辨)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미워도 다시 한번만


다자이 오사무는 희대의 난봉꾼이었습니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는 동경대에 입학할 정도로 수재였습니다. 하지만 학창 시절 대부분을 나태하게 보내다 수업료 미납으로 중퇴했고, 게이샤와 동거를 하다 호적에서 제명당합니다. 술집 여종업원과 동반자살을 하다 자살방조죄 처분을 받기도 하며 이후에는 공산주의에도 발을 담그는데, 마르크스에 심취했다기보다는 자기와 같은 음지의 인간에게 적합하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말년에는 마약에 찌들어 살기도 했었죠.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의 어머니가 이런 모습을 보며 ‘다자이야.. 엄마도 사람이다!! 쫌!!!!’이라고 외쳤을, 당시 명문가에서 금기시했던 오입질, 좌익질, 마약질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던 보기 드문 인물이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인간말종이지만,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발표한 소설인 「인간실격」을 읽으면 어쩐지 그의 허망한 인생행로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동정심을 느낍니다. 어릴 적부터 상대방에게 끊임없이 맞추며 자신을 지워갔던 그는, 사실 인간이 너무나도 두렵고 무서웠으며 이를 감추고자 했던, 한없이 나약했던 인간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를 사랑하고, 연민하고, 동정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삶이 자신이 원했던 방향과 정 반대로 흘러갔기 때문이며, 마침내 쟁취하기보다는 끝내 무릎 꿇고 무너져버린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인간실격」에 매료되어 여러 사람들에게 추천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두고 지인들과 얘기를 나눌 때면 대화 주제의 8-90%가 ‘요조 난봉꾼설’로 흘러가곤 했습니다. 물론 작품 속에서, 그리고 실제 다자이의 행실이 좋지 않았음은 분명합니다. 특히 여자관계에 있어서는 말이죠. 그러나 작품 속 주인공인 요조가 전통적인 남성상으로 여성을 대했다는, 오직 그것만 본다면 도덕적으로는 만족스러울지 몰라도 비참하게 늙어 죽은 요조의 마음은 영원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비록 그 지적이 아무리 정당하다 할지라도 말이죠. 문학에 정답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다른 이를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감수성을 기르는 것이 문학의 기능임을 생각해본다면, 저는 요조의 행동도, 다자이의 마음도 한 번쯤은 되돌아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마지막 고백 


「인간실격」은 다자이의 전 생애를 문학적으로 옮긴, 자전적 성격을 띠고 있는 소설입니다. 주된 이야기가 펼쳐지는 요조의 수기는 가까웠던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글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소설 자체가 다자이의 유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액자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소설의 특이한 점은, 다자이의 분신이라고 볼 수 있는 요조 이외에 소설가를 등장시켰다는 점입니다. 소설가는 일면식도 없는 요조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이는 그 당시 요조를, 다자이를 바라보던 일반적인 사회의 시각을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동시에 소설가의 반대쪽에는 요조를 잘 알고 있는 마담을 등장시켜 밸런스를 맞추고 있죠. 즉, 요조를 개인적으로 모르는 세상의 편협한 시각과, 그를 잘 아는 애정 어린 시각을 동시에 등장시켜놓고서 그 경계선에서 객관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하는 의도로 보입니다. 이러한 설정 덕분에 요조의 수기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독백이 아닌, 허망한 삶을 반추하고 진솔하게 읊조리는 다자이의 마지막 고백으로 느껴집니다.


나아가 소설가를 통해 요조의 수기를 읽는 것은 요조의 내밀한 고백을 동의 없이 몰래 보는 듯한 스릴을 느끼게 합니다. 개인적이고 솔직한 누군가의 일기장을 훔쳐 읽는 심리가 은연중에 자리 잡게 되는 것이죠. 보여주려고 쓴 글과 비밀스럽게 쓴 글의 차이, 그리고 그 글을 읽는 의미는 독자를 작품 속 깊이 끌어들이는 주요 장치로 보입니다. 즉, 굳이 소설가를 등장시키며 자전적 이야기를 썼던 이유는 자신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한편으로는 그만큼 아주 솔직하고 진실하게 고백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다자이 오사무 리즈시절


가면 무도회장을 뛰쳐나간 남자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여러 가지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의 ‘나’, 친구들 사이에서의 ‘나’, 회사에서의 ‘나’ 등 같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어떤 그룹에, 어떤 사회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창 시절 배웠던 용어로 ‘사회화’라고 하며, 다른 용어로는 ‘페르소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헌데 우리는 일반적으로 우리의 다양한 모습을 예민하게 받아들이진 않습니다. 모두가 나의 다양한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살기 때문인지도 모르죠. 하지만 요조는 처음부터 그런 가면 자체를 이상하게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과 사회적 가면들이 너무나도 붙어버려 어떤 것이 진짜 자신의 모습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한다면, 요조의 가면은 그의 얼굴과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으며 오히려 너무나도 이질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적절한 가면이 없던 요조는 사회와 어울리지 못하는 불안을 안고 있었고, 궁여지책으로 익살이라는 가면을 쓰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이에게 자신의 가면을 들킬까 봐 극단적으로 두려워합니다. 진실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알몸의 상태라고 할까요. 그렇게 사람 사이에 녹아드는 방법을 익살로 표현했으며 끊임없이 상대방에게 맞춰가는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익살로 인해 다른 사람의 웃음은 피어나게 했을지 몰라도 정작 자신은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소설의 후반부에서는 자신의 가면이 더 이상 효과를 보지 못하자 삶의 의지를 놓아버리고 방탕한 삶을 보내게 됩니다. 이 소설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사회의 부적응자인 요조가 아니라 ‘페르소나를 권하는 사회’라고 생각됩니다. 요조가 만들어 낸 가짜 이미지에 주변 인물들이 무비판적으로 현혹되는 장면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상대방의 페르소나만을 보려는 심리에서 비롯되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상대방과 나의 페르소나가 교잡합을 가질 때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관계의 불편한 진실을 요조는 차마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타케이치와의 명화 산책     


어릴 적부터 성격파탄자처럼 보이던 요조에게도 진면목을 알아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진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만년 오락부장처럼 웃기려는 강박증이 있는 요조에게 타케이치는 처음부터 그의 가면을 알아차립니다. 요조가 그린 그림의 의미도 대번에 읽어내고 있습니다. 그는 요조에게 두 가지 예언과 함께 반 고흐의 자화상을 선물로 건넵니다. 뜬금없이 등장하는 고흐의 자화상은 무슨 의미일까요.


실제로 고흐는 자화상을 그리며 자신의 내면을 성찰했던 화가였습니다. 정신병이 심했던 말년에도 험한 몰골과는 달리 눈에서만큼은 안광이 서려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평생 대중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가난을 견디면서 광기 어린 삶을 살아야 했던 그는 친동생이었던 테오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합니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만 해도 수 백장이라고 하니 일반적인 동생 이상으로 여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세상에서 공존이 어려웠던 요조에게 타케이치는 테오와도 같은 존재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상 고흐가 그린 자화상은 요조가 그린 도깨비 그림이며 이는 인간 내면에 자리한 솔직한 모습이라는 것이죠. 타케이치가 요조의 도깨비 그림을 알아본다는 것, 그리고 그런 그에게 반 고흐의 그림을 전해준다는 것은 요조의 인생에 굉장한 의미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요조는 모딜리아니의 그림으로 화답합니다. 모딜리아니 또한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채 ‘주정뱅이 예술가’라며 지탄을 받았던 화가입니다. 모딜리아니의 예술은 시종일관 인간을 향해 있는데, 주로 누드 그림을 그리며 관능의 밑바닥에서 물결치는 고독한 영혼을 그린 작가로 유명합니다. 즉, 요조가 타케이치에게 모딜리아니의 ‘구릿빛 피부의 나체 여인’ 그림을 건네었다는 것은, 가면을 쓴 인간이 아니라 맨얼굴의 꾸미지 않은 자화상,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인간 본연의 모습을 강조함으로써 내면의 소통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이처럼 다자이는 그림 교환 장면을 통해 요조와 타케이치가 서로의 내면을 보이고 진심을 주고받은 사이라는 것을 한 번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만약 다자이의 인생의 행로마다 타케이치같은 사람이 한 명씩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인생의 모든 역경에서 완벽하게 이겨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10번 중 한 두 번만 이겨내어도 그다음이라는 희망이 있기에 살아갈 수는 있는 게 아닐까요. 슬프게도 요조에게는 타케이치 이후에 어느 누구도 요조의 진심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반고흐와 모딜리아니의 작품


난봉꾼의 변(辨)


소설의 중반 이후에는 요조와 관련된 여자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여자와 동반자살을 기도한다거나 만화를 그리며 가정을 꾸려 열심히 살아보기도 합니다. 그러다 결국 또 여자가 준 모르핀으로 술을 끊어 보려다 완전히 망가지고 말죠. 이후부터는 거의 ‘요조의 난봉 일기’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결핍, 희망, 좌절, 그리고 마지막의 죽음까지 모든 키워드가 여자로 연결됩니다. 아마도 이 대목을 읽고서 많은 생각을 하실 것 같습니다. 요조를 난봉꾼으로 부르기는 쉽습니다. 현대 사회의 도덕적 잣대로 그를 심판하는 것은 다소간의 도덕적 우월감도 느끼게 해 줍니다. 하지만 저는 요조를 이해해고 싶었습니다. 4번이나 자살시도를 했다가 5번째야 비로소 세상에서 해방된 다자이 오사무를 이해해보고 싶었습니다. 분명 그를 이해한다는 것은 요조의 행동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요조는 익살이라는 가면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욕망에 충실히 복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성격 형성의 원인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요조에게 아버지는 사랑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언제든지 자신에게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도쿄로 가기 전 어떤 선물을 받고 싶냐는 말에 요조는 당황합니다. 어떤 선택지가 아버지의 마음에 들지 전전긍긍하며 눈치를 살피고 알아맞히려고 합니다. 요조라고 어찌 가지고 싶은 것이 없을 수가 있을까요. 하지만 끝내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결국 아버지가 넌지시 말한 ‘사자춤 탈’을 택합니다. 마치 자신이 원했지만 아버지 면전에서 수줍어서 말 못 한 것처럼 말이죠. 저는 아버지와의 일화가 요조의 인생을 함축적으로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후 가르치려고만 드는 호리키, 집안에서 감시자로 보낸 넙치 등 요조의 주위에는 요조라는 인간보다는 자신의 욕망과 생각을 요조에게 강요하는 사람들만 존재하게 됩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요조는 좀비처럼 자신이 살고자 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 존재로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이 마음대로 다뤄도 순응하는 존재처럼 말이죠. 그러다 여자에 빠지게 되는데, 여기서 요조의 주색은 흔히 다른 문학에서 말하는 난봉꾼의 주색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일반적인 난봉꾼이라 한다면 술을 한 다발 들이키고 집기들을 부순다거나 남들에게 피해를 입힌다거나 여자를 함부로 대한다거나 동시에 여러 여자를 만나는 등의 행동을 일삼기 마련인데(ex.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 요조의 주색은 철저히 자기 파괴에 초첨이 맞춰져 있습니다. 프랑수아즈 사강이 말했던 것처럼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곤 하지만 그 파괴가 너무나도 일방적이고 스스로를 향한 것이라, 브레이크를 생각할 수 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책을 여러 번 읽다 보니 한 가지 짚이는 것이 있습니다. 작가인 다자이 오사무도 그렇고 주인공 요조도 그렇고 그 많은 가족 구성원중에 가장 존재감이 없는 인물로 묘사되는 것이 어머니입니다. 다자이의 병약한 어머니. 아마도 요조의 어린 시절 애정을 쏟을 수 없었던 탓에 모성애에 대한 결핍감이 많은 여자들과의 관계에서 불완전한 형태로 드러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조는 수많은 여자를 만납니다. 많은 여자를 만난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혐오감과 두려움을 잠시나마 잊는데 약간의 도움은 되었을지언정, 근본적으로 요조를 구원해주지는 못합니다. 눈 앞의 두려움을 회피한 결과 막다른 곳에 다다른 요조에게는 더 큰 허무감만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후반부에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결혼을 꿈꾸지만 아내는 강간을 당합니다. 이 부분에서 요조의 어조가 의미심장합니다. 자신의 아내가 강간당한 것이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서술하는 문장에서 요조는 완전히 삶을 포기해버린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분명 충격을 받았음이 분명한데 큰 문제가 아닌 것처럼 말하는 요조의 말은 ‘인간에 대한 실낱같은 기대도 사라졌다’라는 의미로 느껴집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책의 마지막에 있는 마담의 말이 뼈를 때리는 것처럼 저리게 느껴집니다. 사실상 마담은 이름이 나오지 않아 요조가 만났던 누구인지를 특정 지을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요조가 만났던 그 어느 누구도 될 수 있다는 말이겠지요. 마담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알던 요조는, 정말이지 순수하고 자상하고,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
  하나님처럼 좋은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마담을 비롯하여 요조를 만났던 모든 여인들은 아마 몰랐을 것입니다. 그렇게 순수하고 자상하고, 좋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요조가 얼마나 많이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였는지를. 다른 사람이 마음대로 다뤄도 순응하기만 하는 살아있는 시체. 요조의 내면을 보지 못하고 주위 사람들은 요조를 좋은 사람으로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무서운 사실입니다. 요조는 꾸밈없는 모습의 인간이 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타인이 요구하는 가치에 들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가장해야만 했고, 결국 가닿지 못하고 무너져내려 스스로에게 '인간 실격'이라는 주홍글씨를 새기고 말았습니다.



다자이를 기리는 앵두기(오토키, 桜桃忌)


무라카미 하루키가 다자이 오사무의 오랜 팬이었다는 사실은 유명한데요, 일본에서는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다자이 오사무를 존경하고, 좋아한다고 합니다. 문인으로써 위치가 일반 작가들과는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다자이의 생일이며 시신이 발견되기도 한 날인 6월 19일에 그를 기리는 ‘오토키(桜桃忌, 앵두기)’는 대표적인 이벤트입니다. 이 날 다자이 팬들은 그의 묘지가 있는 도쿄도 미타카시(三鷹市)의 젠린지(禅林寺)에 모여 그를 기립니다. 여기서 추모객들은 다자이의 묘비에 앵두를 끼워 넣는(????) 방법으로 추모하는데요, 이 무렵이 앵두 수확철인 데다 자살하고픈 생각이 들 때 술집에서 빨간 앵두를 먹으며 3남매 자식을 떠올렸다는 내용의 그의 단편 ‘앵두’를 기리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을 감명 깊게 보신 분들은 날짜를 맞춰 한번쯤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


다자이 오사무를 기리는 추모제 - 앵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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