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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a Oct 12. 2018

자세히 보아야 아름답지 않은 노래들

2012년 봄에 광화문을 가면,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라는 나태주 시인의 글귀가 교보문고 건물에 걸려있었다.


뒤늦게 안 사실인데 2015년 광화문 교보문고 글판 중 최고를 꼽는 설문에서 위 글귀가 1등을 차지했다고 한다.


only if you can

지난번 올린 글 "이해가 되지 않을 리 없다"에서도 두 편을 소개했지만, 자세히 보면 오히려 예쁘지 않은 것들이 있다. 나는 노래 가사들에서 그런 것들을 자주 발견한다.


최근 라디오스타에서 쌈디가 불러서 소소하게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소라의 "처음 느낌 그대로"도 그렇다.


가사:

남 다른 길을 가는 내게 넌 아무 말하지 않았지

기다림에 지쳐가는 걸 다 알고 있어


아직도 가야 하는 내게 넌 기대할 수도 없겠지

그 마음이 식어가는 걸 난 너무 두려워


어제 널 보았을 때 눈 돌리던 날 잊어줘

내가 사랑하며 사랑한단 말 대신 차갑게 대하는 걸 알잖아


오늘 널 멀리하며 혼자 있는 날 믿어줘

내가 차마 네게 할 수 없는 말 그건 사랑해 처음 느낌 그대로


위 가사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인 사연이 있든 원래 스타일이 그렇든 눈을 마주치면 쌩까지만 속으로는 사랑하는 그런 사이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아름답게 느껴지지가 않을 뿐.


"남: 여보세요~? 어제 나 자기 보고 인사했는데 자기 그냥 지나가더라..? 못 본 거야?"

"여: 아..? 어... 음... 못 봤어..."

"남: 아 그래.... 뭐...  오늘 저녁때 뭐해~?"

"여: ... 집에서 쉬어...."

"남: 그럼 뭐 저녁이나 먹을까?"

"여: 아니 그냥 좀 피곤해서... 쉴게...."

"남: 음.. 그래... 그래 그럼 쉬어~"

"여: 응...... (처음 느낌 그대로 사랑한다는 걸 알아줘...)"


이런 패턴이라는 건데... 좀 creepy하다.


지난번에도 박효신 노래를 언급했는데 다시 언급해서 좀 죄송하긴 하지만...


박효신의 "해줄 수 없는 일"도 자세히 보면 가사가 이상하다.


가사:

할 말이 있어 어려운 얘기 내게 힘겹게 꺼내놓은 네 마지막 얘긴 

내 곁에 있기엔 너무 닮지 못해서 함께 할 수 있는 건 이별뿐이라고 


아무것도 난 몰랐잖아 너를 힘들게 했다는 게 그런 것도 몰랐다는 걸 도무지 난 용서가 안돼 

아무것도 넌 모르잖아 나를 차갑게 돌아서도 내일부터 볼 수 없어도 내 안의 넌 달라지는 게 아니란 걸 


그렇다는 걸 너도 알고 있잖아 네가 원하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단 걸 

해줄 수 없는 건 오직 한 가지뿐야 너무 사랑하면서 너를 떠나가는 일 


너를 위한 길이라면 그러고 싶어 받아들이려고 해 봐도 이별까지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네가 없이 살아가는 게 나에게는 자신 없으니까 


아무 말도 못 들은 걸로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오늘 일만 지워버리면 우리 둘은 달라지는 게 없잖아 

더 지치게 하는 일 없을 테니



이 노래도 얼핏 듣기에는 "너가 원하는 것을 다 해줄 수 있지만, 단 한 가지 해줄 수 없는 것은 이별하는 것이야 ㅠㅠ"라는 순정파 같지만, 첫 가사를 좀만 생각해보면 상당히 creepy한 놈이다.


"여: 나 많이 생각해봤는데... 너랑 만나는 게 너무 힘든 것 같아... 우리 헤어지자..."

"남: (충격 받음) 내가 널 힘들게 했어...?"

"여: 몰랐구나...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아무튼 우린 헤어져야 할 것 같아..."


(집에 옴)


"남: (전화를 걸어서) 내가 생각해 봤는데.. 내가 너를 힘들게 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것이 일단 나 스스로한테 너무 화나고... 그리고 너가 헤어지자고 말한다고 해서 내가 널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는 것은 아냐.. 난 아직 널 너무 사랑해!!"

"여: 이러지 마... 나 너무 힘들어.. 여태껏 힘들었고 지금도 너가 이러면 더 힘들어..."

"남: 내가 널 힘들게 했다는 걸 몰랐다는 게 도무지 용서가 안돼!! 우리.. 그냥 오늘 일 없던 걸로 하자.. 응? 앞으로 힘들게 안 할 테니까... 내일 보면 또 우리 오늘 일 없었던 것처럼 인사하는 거다..? 응?"


뭐 대충 이런 패턴인데... 이런 남자를 겪어 본 적이 있는데 상당히 곤란하다.

상대방의 이별 통보를 투정 정도로 적당히 걸러서 듣는 타입들... 전형적인 데이트 폭력의 시작...


암튼... 


가끔 음악에 너무 깊게 감정이입을 하고 자세히 보고 오래 알면,


더 예쁘지 않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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