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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a Aug 21. 2019

[단편] 그림자남

나는 햇살을 좋아한다.


로스앤젤레스의 내리쬐는 햇살이 좋은 것이 아니라, 시애틀의 울창한 침엽수들 밑으로 스며들어오는 햇살이 좋다.

하지만 성격상, 어느 쪽이 분명히 좋은 것이라고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그저 어렴풋하게 어렴풋한 쪽이 좋다고 느끼고 있을 뿐이다.


그런 어렴풋한 내 인생에 상당히 또렷하게 온전한 확신을 갖고 사랑했던 남자가 있었다.


그 사람은 나의 어렴풋한 면을 이해하고 사랑해 주었고, 그건 그 남자 이전이나 이후에 느껴보지 못한 특별함이었다.


그 남자와 시간을 공유하던 때에 나의 작품세계에 많은 영향을 받아서 빛과 그림자에 대한 글을 많이 썼고, 그는 나의 작품세계를 겨울 숲에 흘러내리는 햇살 같다고 해석해 주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햇살을 좋아한다고는 해도 정말로 좋아하는 것은 햇살과 그림자의 조화인 것 같다. 햇살은 햇살 자체만으로는 좋아하기 어려운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그는 내 삶의 그림자가 되었다.


마치 지구의 공전이나 생태계의 순환같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그 자연스러움을 받아들이는 일은 지독하게 힘든 일이었지만, 돌아보면 자연스럽기만 할 뿐인 일이었다.


햇살이 내리쬐었고, 나무를 뚫고 가리워진 길을 비추다가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여전히 난 어렴풋한 쪽이 좋다.


다시 한번 내 인생에 햇살이 비춘다면, 최대한 숲 안으로 은은하게 비추게 해서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지만,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도통 모르겠다.


이제 또 여름이 지나간다.


이번 겨울에는 기필코 겨울 숲에 흘러내리는 햇살 같은 작품을 완성하고 싶지만, 사실 자신이 없다.


올해 겨울엔 해가 비추는 날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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