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4화. 다시 시작하게 된 계기

세 가지 시간에 피어난 무지개를 담다

by 기록하는 엘리

2부. 현재 ― 살아내는 시간 (Day 11~20)

11~15일 : 내 삶의 전환점

Day 14. 다시 시작하게 된 계기


— 비눗방울 속에서 본 무지개를 보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며 상실의 숲을 헤매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역설적으로 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멈춤'과 '육아'였다.


[벼랑 끝에서 들려온 외침, "나 진짜 죽을 것 같아"]


상실의 무게가 임계점을 넘었을 때, 나는 비로소 무너졌다. 완벽주의라는 갑옷은 너무 무거워 나를 짓눌렀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듯한 일상은 나를 고갈시켰다. 쳇바퀴에서 내려오면 당장이라도 굶어 죽거나 낙오자가 될 것 같다는 공포에 질려 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주변을 향해 비명을 질렀다. "나 진짜 죽을 것 같아. 왜 이렇게 살아야 해?"


그때 나를 잡아준 것은 내가 그토록 집착했던 성취가 아니라, 내 곁의 사람들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너를 괴롭히니, 조금 내려놔도 괜찮아." 그 평범한 한마디가 나를 깨웠다. 그들의 지지 속에서 나는 '내가 허용할 수 있는 삶의 포기'가 사실은 '진정한 나를 찾는 선택'임을 깨달았다.



[신의 직장은 없다: 고정관념의 파괴]


'신의 직장은 없다, 신은 회사를 다니지 않기에'라는 우스갯소리가 그날따라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느껴졌다. 나를 쳇바퀴에서 내려오게 한 결정적 계기이기도 했다. 내가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직장과 커리어가 사실은 내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았고, 지금의 나에게는 가장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역설적으로 '포기할 용기'가 생겨났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나를 살리기 위한 첫 번째 '시작'이었다.



[아이의 눈망울에서 만난 '비눗방울'의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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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라는 거울: 내 안의 어린아이를 만나다


육아휴직 기간, 아이와 함께 비눗방울 놀이를 하던 찰나가 내 인생의 두 번째 전환점이 되었다. 허공을 떠다니다 '탁' 하고 터져버리는 비눗방울을 보며 나는 내 인생의 좌절들을 떠올렸다. 박사 학위, 완벽한 커리어. 터져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그 찰나의 순간 동안 얼마나 아름다운 무지갯빛을 내뿜었는지를 보게 된 것이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나에게 '효율'이 아닌 '존재'의 의미를 가르쳐주었다. 아이는 내가 박사 학위가 없어도, 대단한 연구개발자나 기획자가 아니어도 나를 온 우주처럼 사랑해주었다.


아이는 비눗방울이 터졌다고 울지 않았다. 오히려 터지는 그 순간의 짜릿함을 즐기며 다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이를 보며 나는 깨달았다. 인생은 견고한 성을 쌓는 과정이 아니라, 매 순간 정성껏 비눗방울을 불어내는 과정 그 자체라는 것을. 박사 학위를 따지 못한 것도, 직무가 바뀐 것도 실패가 아니라 그저 하나의 방울이 터진 것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내 손에 여전히 비눗방울 용액이 남아있고, 나는 다시 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이라는 거울을 통해 나는 내 안의 상처받은 어린아이를 다시 마주했고, 그 아이에게 "다시 시작해도 괜찮아"라고 말해줄 수 있게 되었다.


아이의 맑은 눈망울 속에서 나는 과거에 상처받고 울고 있던 나 자신을 발견했다. "괜찮아, 너는 무언가를 증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귀하니까." 아이를 돌보는 행위는 사실 내가 그토록 외면했던 내 안의 어린아이를 다시 살려내는 치유의 시작이었다.



[기록의 힘: 비눗방울을 영원으로 만드는 작업]


다시 시작하게 된 가장 구체적인 동력은 '기록'이었다.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자서전을 정리하며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고 있다. 과거의 아픔을 글로 옮기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히는 유령이 아니라 내 성장을 돕는 데이터가 되었다. 기록은 나에게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해주었고,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제 나는 회사나 사회가 정해준 로드맵이 아닌, 나만의 지도를 그린다. 찰나에 터져버리는 비눗방울 같은 인생일지라도, 그 순간의 무지갯빛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면 그것은 허무가 아니라 예술작품이 된다는 것을 글을 쓰며 알게 되었다. 또한, 육아휴직은 경력 단절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을 재기획하는 시간'이 되었다. 공학적 사고와 기획자적 통찰, 그리고 엄마로서의 공감 능력이 합쳐져 예전보다 훨씬 더 풍성한 '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제 완벽을 꿈꾸지 않는다. 다만 오늘 하루, 내 마음이 시키는 길을 따라 가장 나다운 비눗방울을 날려 보낼 뿐이다. 상실의 숲에서 길을 잃었던 나는, 이제 기록이라는 등불을 들고 새로운 세상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간다.


기록은 나에게 '결과'가 아닌 '과정'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박사 학위를 따지 못한 것도, 직무를 변경하며 방황한 것도 모두 내 인생이라는 커다란 그림을 그리기 위한 밑그림이었음을 기록을 통해 확인하게 된 것이다. 내가 경험한 조각의 파편들은 깨지고 부서졌더라도, 반짝이는 수백가지 결정체들이며, 모아서 점을 이으면 하나의 별자리로 이어질 것이다.



[다시 찾은 나: 포기가 아닌 발견의 여정]


육아휴직 기간은 나에게 공백이 아니라 '창조적 복원'의 시간이었다. 나는 직함을 잃었지만 '주도권'을 찾았고, 완벽함을 포기했지만 '유연함'을 얻었다. 사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며,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나를 보며 나는 비로소 확신했다. 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크고 단단한 '나'를 발견하기 위해 잠시 우회했을 뿐이다. 이 깨달음이 나를 다시 시작하게 했고, 이제 나는 타인의 지도가 아닌 나만의 지도를 들고 다음 계절로 나아갈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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