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햇 Dec 03. 2022

불빛 없는 미국 크리스마스 점등식에 다녀오다

 첫 크리스마스 점등식


   12월이다. 블루밍턴은 추수감사절이 끝나자마자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빠르게 태세 전환을 마쳤다. 12월 첫날 밤, 남편 학교에서 크리스마스 점등식을 한다고 해서 설레는 마음을 안고 나가보았다. 미국에서 맞이하는 첫 크리스마스 시즌인데다가, 원래도 조명 장식이 주는 감성을 좋아하는지라 기대가 많이 되었다.


   7시부터 점등식 행사가 시작된다고 하여, 일찌감치 출발을 했다. 1분 1초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여기는 이미 한겨울 날씨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따뜻하게 껴입고 집을 나섰다.  일찍 출발한 탓에 시간이 남아서 가는 길에 다운타운에 들러 크리스마스 조명들을 구경했다. 길게 늘어뜨린 조명이 밤하늘에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가게들도 쇼윈도를 한껏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꾸며서 참 예뻤다.


다운타운의 중심, 빛이 모이는 곳 - 시청





  조명과 트리로 반짝이던 다운타운을 지나 학교로 향했다. 가는 길이 이상하리만치 어두워서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겨울밤에는 원래 이렇게 어둡나?' 생각을 해봤다가 '아, 오늘이 점등식이라 극적인 효과를 위해 더 주변을 어둡게 했구나!'하고 깨달음을 얻었다. 아무리 그래도 조금 너무 어두워서 영 무서웠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마침내 점등식 행사장에 도착했다. 행사장도 어두컴컴했지만 굴하지 않은 채 크리스마스 윈터마켓도 둘러보고, 진저 쿠키도 먹으며 기다렸다.


진저쿠키와 라이트
크리스마스 윈터마켓 앞에서 한 컷!
특설(?) 아이스링크, 규모 약 6평 정도 추정^^;;



   7시 15분쯤, 한 무더기의 늘씬한 여학생들 무리가 행사장 가운데에 자리 잡았다. 가십걸을 찢고 나온 듯한 아이들이 맞춤 옷을 입고 몸을 풀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미국의 치어리딩 팀을 처음 보게 되어 신기했다. 축하무대가 너무 어두워서 사진에 담기지가 않았다. 빛 한 점 없지만 유쾌하고 신나는 치어리딩이었다. 조명이라도 하나 좀 설치해 주지 싶을 정도로 어두웠으나, 치어리더 아이들은 어둠 속에서 자신들의 일을 마치고는 파이팅 넘치는 구호를 외치고 홀연히 사라졌다. 긍정적이다......!


빛 한 점 없는 치어리딩 공연. 갤럭시 보정으로 밝기를 최대화해보았다.


    발랄하고 유쾌했던 치어리딩이 끝나고 바로 모종의 행사가 시작되면서 다같이 카운트 다운이라도 할 줄 알았건만 요상한 침묵과 어두움 만이 행사장을 채웠다. 이윽고 어둡고 무료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슬슬 바닥에서 냉기가 몸을 타고 올라오고 기다림이 지루해질 찰나, 핸드폰을 보던 남편이 학교에서 이메일 공지가 와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학교에 전기가 나갔단다...... 그제야 그 모든 어둠이 갑자기 이해가 되었다. 하긴, 아무리 밤이어도 사람 다니는 길이 그렇게 어두울 수가 없는 것이었다. 기대감이 비눗방울처럼 터져 없어져 버리고 실망만 가득 남은 상황에, 믿을 수가 없어 스태프에게 확인차 다시 물어보았다. 그녀는 아주 명랑하게 "응! 전기가 나가서 점등식은 못해해! 그렇지만 윈터 마켓이랑 스케이트장이 있으니 구경해!"라고 말하였다.


   기대를 잔뜩 하고 온 지라, 너무 황당했다. 점등식 날 하필 전기가 나가는 건 무슨 경우며, 그 상태에서 또 행사를 그대로 진행하는 건 뭘까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무거운 발걸음을 뒤로하고, 집으로 향해 뜨끈한 잔치국수나 한 그릇 말아먹고 말았다. 칠흑과 정전으로 함께한 미국에서의 첫 크리스마스 점등식이었다.



한때 인터넷에서 유행하던 밈이 생각난다.

인생 대충 살자 - 빛 없이 점등식하는 블루밍턴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연말에는 조금 놀겠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