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밍턴을 처음 맞이한 계절이 여름이었다. 그리고 어느덧 벌써 블루밍턴에서 맞이하는 세 번째 여름이 되었다. 미 중북부 특성상(미국에서는 Mid-Western이라고 하지만), 늦가을부터 봄까지 시간이 길기도 길고, 춥고 어둡고 흐린 날이 많다. 반면에 여름에는 맑고 쨍-하니 화창한 날도 많고, 기온도 높고 동네 전체적으로 푸른빛이 돌아서 한결 생동감이 있다.
그 무엇보다도, 긴 여름 방학이 있다. 한국에서 한 달을 보내고 와도 여전히 한 달 반의 방학이 더 있었으니 말이다. 어찌 이 계절이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학기 중에는 프로그램의 특성상, 투 잡도 쓰리 잡도 아닌 포 잡을 해야 한다(풀 타임 학생, 연구자, 상담사, 시간 강사). 그러나 방학에는 원잡만 하면 된다(파트타임 학생 0.3, 파트타임 연구 0.7). 학업 외적으로 하고 싶은 것도 마음껏 하고, 건강도 챙길 시간적 여유도 생긴다. 학기 중에는 워라밸? 그 단어 자체만 들어도 실소가 나오니 말이다.
하여, 오늘은 워라밸의 '라'를 담당하고 있는 여름 라이프를 가져와 보았다.
요즘 푹 빠진 크로아상과 반숙 계란, 따뜻한 라테로 먹는 아침이다. 느릿느릿 한 음악도 틀어 둔다. 원래 먹는 것이 되게 느린 편인데, 학기 중에 나갈 채비를 할 때 억지로 서둘러 입속으로 떠미는 식사에 위에 부담이 많이 됐었다. 요새는 재촉할 것 하나 없이 창문 밖을 보면서 세월아 네월아 아침 식사를 먹을 수 있어 좋다. 다 먹고도 자리를 뜨지 않고 한참을 창문 밖을 구경을 하면서 앉아 있는다.
그러다, 커피가 좀 돌고 머리가 맑아지면 브런치북 편집을 한다. 얼마 전, 두 개의 브런치북도 처음으로 발간했다. 첫 번째 브런치북은 여행기를 엮은 책이고, 두 번째 브런치북은 해외 생활의 단상과 에피소드를 묶은 책이다. 의식의 흐름 따라 써둔 글이 백 개도 넘어서, 다시 읽고 다듬는 것도 은근히 손이 많이 간다. 그래도 좋아서 하는 일이라 재미있게 하고 있다(많이 읽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다). 이런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면 도전해 보지 못했을 것 같아서, 이번 여름 방학 개인적으로 가장 뿌듯한 일 중 하나다.
https://brunch.co.kr/brunchbook/bloomstranger
https://brunch.co.kr/brunchbook/psychtravel
편집을 하다가 조금 질리면 밀리의 서재에 들어가 책을 읽으며 정신을 환기시킨다. 요즘 읽는 책은 니체의 자존감 수업과 초역 부처의 말 두 개다. 니체의 자존감 수업은 표지가 너무 예뻐서 자석처럼 이끌렸다. 요즘 책들은 참 감성적이고 예쁘게 나온다. 두 책 다 공통적으로, 스스로에게 되뇌고 싶은 말들이 많이 담겨있어 유익했다. 어찌 보면 '뻔한 말들' 일 수도 있겠지만, 평온하고 맑은 마음 상태에서 읽고 되새기는 문장들은 삶에 꽤나 영향력이 있다. 독서가 스트레스를 낮춰주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사진에 블루밍턴의 여름 색감이 잘 담겼다. 남편과 하루 선크림을 듬뿍 바르고 같이 야외 테니스를 치러 다녀왔다. 사진을 뚫고 나올 것만 같은 진한 색감의 하늘, 그리고 구름과의 대비, 쨍한 코발트블루 코트와 무성한 나무들 어느 것 하나 어여쁘지 않은 것이 없다. 야외 테니스 코트는 참으로 그림 같다. 테니스는 한결같이 잘 못 치지만, 그럼에도 계속 나가고 싶어지는 마법이다.
서울과 비교했을 때 코트 수도 많고 빌리는 것이 어렵지 않아서 수월하게 원하는 때 아무 때고 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여름에는 다들 이 타운 밖으로 빠져나가서, 아무 때나 가도 전세를 내고 칠 수 있다. 시원한 파워에이드 하나 가지고 나가면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풍경만큼 실력도 멋지면 좋았겠지만, 오늘도 허우적거리고 만다.
시간이 많아진 이번 여름, 살면서 운동을 제일 열심히 하고 있다. 규칙적으로 꾸준히 운동을 통해 체력 단련을 하는 것을 동경만 했지, 늘 실패로 끝났었다. 그러다 드디어, 이번 여름에는 주에 3~5회 사이로 꾸준히 운동을 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시간적 여유가 많아진 것이 절대적으로 크다는 것을 실감했다. 또, 그간은 일정이 워낙 달라서 각자 다녔는데 올여름 운동을 남편과 같이 다니니 시작하면서 의무감이 생겨서 더 규칙적으로 가게 된 것도 있다. 같이 다니는 게 아무래도 재미가 더 있어서 잘나가게 된다.
종목은 헬스와 수영을 섞어서 가고 있는데 주 1회 정도는 수영을 하고 나머지는 헬스를 한다. 근력 운동이 워낙 초보라 하루하고 나면 이틀까지 근육통이 심하다. 이런 날에는 헬스는 도저히 못 가겠고, 수영을 다녀오면 몸이 한결 풀리고 덜 부담스럽다. 또, 헬스에서 달리기를 하는 게 수영할 때 숨이 덜 차는데 도움이 되어 상호작용이 좋은 것 같다. 학기 중에 이렇게 할 자신은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래도 이번 방학 처음으로 규칙적인 운동 습관을 실천한 것에 뿌듯하다.
방학 동안 남편이랑 둘이 노는 시간들이다. 요즘 낮에는 같이 책을 읽고, 저녁에는 영화 보면서 맥주와 짠 과자를 먹는 것이 낙이다. 타키스 체다치즈 맛과 차가운 맥주 페어링이 끝내준다. 아무래도 차가운 맥주는 여름에 가장 맛있다. 여름의 소소한 행복이다. 이렇게 말하면 되게 술 잘 먹는 사람 같아 보이나, 문제는 조금만 마셔도 영화 속 주인공이 두 명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다음 생에는 반드시 주당 DNA를 타고나보리라 다짐해 본다.
방학 중 타운에 있는 동기들 일부와 모여 맛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예전부터 가고 싶었던 레스토랑인데 음식이 퍽 괜찮았다. 내가 고른 메뉴는 플랫브래드인데 피자같이 생겼다. 친구들 각기 다 매우 다른 모습의 방학을 보내고 있어서 이야기를 듣는 재미가 있었다. 확실히 나 홀로 외국인이라 그런지 미국 친구들에 비해 삶의 양상이 다르긴 많이 다르다. 어떤 친구는 학기에 비해 루틴이 너무 무너져서 오히려 학기가 빨리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도 있었다. 방학에 루틴이 없어서 마냥 행복해하는 나는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는 후문이다.
모쪼록 워라밸의 '라'가 번영하는 여름을 보내고 있는지라, 개인적으로는 학기가 아주 천천히 왔으면 좋겠다. 어떤 속도로든 다가오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아직은 조금 더 이 찬란한 여름 라이프에 젖어있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여름의 시계가 천천히 흘러가기만을 바라며, 포스팅을 마무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