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으로 유학 나온 이래로 사회적으로 가장 혼란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 외국인 신분으로 살기에 이상적인 상황은 아님은 확실하다. 뉴스 너머로 들려오는 소식들에 심란한데 또 마냥 그 감정에 잠겨있을 시간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상의 굴레는 더없이 바쁘게 흘러가기만 한다. 새로운 챌린지와 이슈들이 가득한 새 학기 일상으로 들어가 보자.
개강하자마자 랩에서 이번 학기부터 런칭할 연구 프로젝트가 너무 바빠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매뉴얼, 프로토콜, 트랙커 등등 셋업 해야 하는 업무들이 일단 정말 많은데 또 차분히 업무 쳐낼 시간이 없어서 스트레스다. 학과 클리닉 스탭들과 타 학교 연구진들과 콜라보를 하기 때문에 여러 명이 주고받는 메일이 하루 종일 쌓이고, 미팅의 릴레이다. 미팅 한 번 하고 올 때마다 추가로 해야 하는 실무가 무한 리필된다. 미팅을 마치고 차로 운전해서 집까지 오는 동안만 이메일이 8통이 와있던 날도 있었다. 정신적으로 되게 피로하고 스트레스받는 중이다.
인건비가 한 명 포지션밖에 없어서 도움받을 길 없이 혼자 프로젝트 실무를 다 해내야 하는데 한숨이 나온다, 어휴! 사람 한 명만 더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막상 론칭 시작하면 좀 나아지려나 모르겠다.
이번 학기 퀄시험 공지가 나왔다. 페이퍼와 구술시험으로 구성되는데 페이퍼 분량이 상당하다. 지금부터 쓰기 시작해야 하는데, 아직 연구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공지도 못 읽어보았다. 언제 다하나 싶은데 다음 주부터는 라이팅 그룹도 시작하니, 어떻게든 시작이라도 해야 할 텐데 말이다.
이번 학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바빠지기 전(?) 지도 교수님이 Quality of time을 보내고 싶다고 밖에서 점심도 사주고, 우리 랩 박사쌤들과 배우자들까지 다 모아서 집에 초대해서 조찬 파티도 열어주셨다. 교수님 근데 저는 이미 너무 바쁜데요(눈물). 요새 일을 너무 많이 주셔서 내적으로 조금 원망하고 있지만, 그래도 인격적으로 푸근하게 잘해주고, 인도적이고 그저 따뜻한 분이다. 주말 아침에 교수님 댁에서 근사하고 맛있는 아침 식사와 차를 얻어먹고, 다 같이 게임도 즐기고 좋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남은 주말 동안 월요일까지인 업무를 열심히 했다...! 언제나 밥값은 빡센 법이다.
함께 간 남편이 내조하느라 고생을 했다. 아는 사람도 많지 않고 낯설고 어려운 자리일 수 있었는데, 잘 어울리고 와서 기특했다. 후배네 부부와는 원래도 교류를 많이 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미국 생활에 또 배우자 동반 모임은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니까 좋은 경험이었으리라 믿는다.
지난주부터 온 학교와 타운을 들썩하게 한 일은 단연 풋볼이었다. 우리 학교가 전미 대학 풋볼 리그 플레이오프에서 우승을 한 것이다. 개교 이래 최초라고 한다. 다들 얼마나 열정적이던지, 영하 11도 날씨에 게임 24시간 전부터 펍에 오픈런을 해서 들어가겠노라고 밤새 줄을 섰다고 한다. 우승 후에는 흥분한 사람들이 학교 메인 로드로 뛰쳐나와서 전봇대에 오르고, 불을 지르고, 가게들 지붕에 올라가 포효하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덕분에 한 주 내내 스몰토크는 거의 풋볼이었던 것 같다.
원래 풋볼은 크게 관심이 없었는데 하도 온 동네가 들썩거리니 나와 남편도 음료와 팝콘을 갖춰서 처음 풋볼 경기를 관전했다. 막상 보니까 생각보다 역동적이니 재밌었다. 보기만 해도 아플 것 같은 기분이지만 말이다. 난생처음 본 풋볼 경기나 내셔널 챔피언 경기가 되다니 신기했다. 모쪼록 학교와 동네의 역사적인(?) 순간에 존재할 수 있어 즐거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역사적인(?) 일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미국에 전례 없는 윈터스톰이 온다는 소식이었다. 주말을 앞두고 금요일 저녁에 크로거에 들러보니 매대들이 아주 텅텅 비어있다. 금요일에 심리 상담 센터에 출근했더니 그 다음주 월요일 세션이 잡혀있던 내담자들이 캔슬하거나 일정을 바꾸고 있었다. 또, 스텝들이 다들 장 봐두었냐, 차에 가스 가득으로 넣어두었냐 서로서로 체크인을 해서 아, 이게 그렇게 큰일인가 보다 싶었다. 한편으로는 그냥 눈 많이 오는 건데 왜 이렇게 패닉바잉을 하나 싶은 생각도 있었다.
뭐 그러나 저러나 준비해서 나쁠 건 없으므로 적당히 그냥 필요한 것만 평소에 장 보듯이 사 두고 윈터스톰을 기다렸다.
그리고 도래한 주말,
푹 자고 일어나니 도로와 인도가 구분이 아예 안 되고, 차는 바퀴 높이까지 아예 눈에 폭 파묻혀 버렸다. 아, 패닉 바잉이 아니었구나, 이건 마트까지 절대 못 가겠구나 싶었다.
토요일부터 시작해서 일요일 오전까지도 눈이 계속 일정하게 많이 내렸다. 집 앞에 세워둔 차가 눈사람 케이크가 되어 없어져가는 것을 지켜보며 일단은 내리는 눈이 소강상태가 되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전기나 물 공급은 안정적이라 실내에서 눈 내리는 것을 구경하며 나름 낭만적인 시간을 보냈다. 아, 예뻐라!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하루 종일도 보고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진은 아침 먹으면서 눈 구경하는 남편. 잘 나와서 한 컷 남겨보았다. 내가 찍어줬지만 너무 잘 나온 것 같아서다.
일요일 오후쯤 되니 눈이 소강상태가 되어 차에 눈도 치우고 눈 속 산책도 즐길 겸 중무장을 하고 나와보았다.
처량한 가라지 없는 미국 저소득 하층민의 삶이란......! 생각보다 눈이 훨씬 더 많이 쌓여 있었고, 눈 치우는 일은 고역이었다. 왜 군인들이 눈을 보고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라고 하는지 이해가 갔다. 밟고 놀 때는 그저 예쁘고 좋은데, 치우려니 생각보다 너무 힘이 드는 것이었다. 소복하고 예뻐 보이는 이 덩어리들이 삽으로 치우려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는 것이다. 계속 내리는 눈을 맞으며 한 시간을 거의 꼬박 들여서 겨우 치웠다.
오늘 운동은 이걸로 다했다.
고된 제설 작업을 마치고는 남편과 동네 한 바퀴 돌고 왔다. 무릎까지 발이 푹푹 빠지는 길이었지만, 눈을 워낙 좋아해서 신나게 놀다 왔다. 다음 날 학교 출근을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도 되었지만, 그간 바쁘고 스트레스받던 일상에 꽤나 즐거운 이벤트였다.
그리고 그날 저녁, 학교로부터 이튿날 월요일에 대한 Limited Operation 문자를 받았다! 유학하면서 학교가 눈 때문에 닫는 것은 처음 봤다. 물론 아예 닫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8시 출근하는 날이었는데 계탔다! 덕분에 집에서 아늑하게 제한적 재택근무를 하면서 이렇게 포스팅도 하며 보내고 있다.
스트레스받는 일들도 많지만 이렇게 또 기록하고 돌아보니 소소하게 즐거운 이벤트도 많았구나 싶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꽤 많이 남았다. 이번 학기도 어찌저찌 살아남는 서양도비가 되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