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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햇 Sep 25. 2019

번아웃 증후군, 그 뒤에 오는 것들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되는


   

   불안은 늘 나를 쉼 없이 달리게 하고, 의욕은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오만을 갖게끔 한다. 허나 체력 하나만은 참으로 겸손하여 한계로운 인간임을 실감시켜주곤 한다. 옐로카드를 무시한 채, 숨 가쁜 평일을 보내고 주말 이틀에 걸쳐 잔업과 학원 수업, 8시간짜리 워크숍까지 달리고 나니 소진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기분이 계속해서 다운되고 작은 일도 큰 힘듦으로 느껴졌다. 소소하게 몸이 계속 아팠다. 벌려 놓은 여러 가지 중 무엇하나 만족스럽게 잘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나를 힘들게 했다. 루틴하게 쉽게 해오던 일도 갑자기 이상하리만치 영 쉽지가 않다. 몸도 마음도 그다지 좋지가 않아 더는 생산성을 낼 수 없을 것 같아 덮어놓고 쉬기로 결심했다. - 종종 나를 찾아오는 친구, 번아웃 증후군이다.



   스스로 박탈했던 주말을 다시금 주섬주섬 찾아오기로 했다. 월요일과 화요일 일정과 해야 할 것을 최소화하고, 화요일 저녁 출근 전까지 충전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있다가 낮 시간에 날씨가 너무 좋아 볕을 쬐고 싶어서 노천카페로 나갔다. 노천카페에서 볕을 쬐며 멍을 때리다 보니 텐션이 올라왔다. 역시 사람은 볕을 쫴야 돼 라고 중얼거리며 따릉이를 하나 빌렸다. 집 앞 공원이나 크게 한 바퀴 돌까 해서였다. 한 평생을 살며 백만 바퀴 정도 돌아본 공원은 걷기엔 한 없이 크지만, 자전거로 돌기엔 참으로 작았다.

 


   해서, 좀 먼데로 나가고 싶은 마음에 자전거로 저녁 출근을 하기로 급 마음을 먹었다. 출발지는 올림픽공원, 도착지는 광진구 군자역에 있는 마음시 심리상담센터. 밑도 끝도 없는 자전거 여행을 시작했다. 한 평생 늘 그랬듯, 이 날도 아무 계획 없이 시작된 일이었다. 역시 삶은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것 제 맛이다. 어쩌면 해야될 것에 옭죄이지 않고 그냥 하고 싶은대로 좀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지도로 보자면 이런 루트였다.



    인상적이었던 건, 공원도 가로지르고 한강도 건너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금 겁이 나기도 했다. 자전거로 한강을 건널 수가 있나? 항상 차로만 여러 대교들을 지나 봤지 자전거나 도보로 지나 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에라 모르겠다. 21세기 스마트 지도를 믿어보자 하며 여정을 시작했다.



   잠실 철교에 이르러서 맞이한 한강공원의 자전거길은 가을스럽고 아름다웠다. 강변의 바람이 쾌적하기 그지없었다. 평일 낮의 한강은 사랑스럽다. 이 장면을 함께 누리고 싶은 이에게 왜 지금-여기에 불참 중이냐고 속으로 핀잔을 한 번 줬다. 현실을 다 뒤로 하고 그냥 지금 이 순간에 딱 함께하고 싶을 뿐인데, 그게 허락되지 않는 게 슬픔으로 다가왔다. 아무도 없는 평일 낮을 함께 보내는 것, 그게 큰 욕심인가 싶다가도 부질없고 비현실적인 바람이란 생각이 들어 슬펐다.


왜 안왔어 한강공원? - 프로불참러 당신께 바치는 사진



     이 날씨, 이 온도는 찰나에 끝나버릴 텐데 이 순간을 함께 포착하지 못하는 게 통탄스러웠다. 우리는 왜 늘 많은 것들을 다 지연하고 살아가야만 할까. 회색 건물 안에서 보내는 시간은 다 무엇을 위한 것일까? 오로지 돈일까.



    그렇다면 이 아름다운 가을의 주인은 대체 누굴까? 아, 나로구나. 지금 나는 여기에 있구나, 없는 것만 찾아가며 눈 앞에 있는 아름다움과 시간을 놓치고 있구나.



    가을은 사람을 철학자로 만든다.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면서 엘리베이터에 몸과 자전거를 싣고 철교에 올랐다.



일시정지 - 나를 버겁게 하는 것들도



   자전거로 올라본 잠실 철교는 참으로 오묘했다. 쨍한 오후의 볕이 필터처럼 펼쳐져 있다. 쭉 뻗어 있는 좁은 자전거와 보행길이 눈에 들어온다. 자전거로 건너기에는 생각보다 한강은 꽤 긴 거리였다. 아마 걸으면 것이다. 한강을 이렇게 건너 다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까? 무슨 생각들을 하며 걸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길디 긴 잠실철교를 지나면서 빼곡히 들어선 빌딩들과 아파트들을 눈에 담아보았다. 많기도 많아라. 이 많은 건물들엔 누가 있을까? 그 안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을까? 서울은 왜 이리도 슬프게 생긴 것일까? 왜 다들 힘들게 생긴 것일까? 아, 투사구나 - 나는 왜 요즘 꿀꿀할까?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너무 많은 생각들이 지나간다고 느껴질 때쯤 잠실철교가 끝이 났다. 경사로를 따라 잠실철교 다리에서 쭈욱 미끄러져 내려와 한강공원으로 진입했다. 내리막길이 밀어주는 힘에 바람을 가르며 빠른 속도로 내달렸다. 잠실철교에서 나를 찾아왔던 온갖 생각들이 바람에 다 날아감이 느껴졌다. 한참을 내려가기만 했다. 평지에 다다를 때쯤엔 이내 뜻 모를 평온함이 찾아왔다. 번잡함을 다 쏟아내고 온 느낌이었다.







   센터에 도착할 때쯤 되니 따릉이를 빌린 지 한 시간이 다 되어간다는 알림톡이 왔다. 기가 막히게 3분

을 남긴 채 완주했고, 따릉이를 주차시키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자전거를 한참을 굴렸던 몸은 상쾌하고 개운했다. 어딘지 모르게 조금 힘이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짧은 일탈이자 일상의 심폐소생술 같은 시간이었다.



   다 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들을 조금 내려놓고 천천히 오래 가보자고 생각한다. 이제 그만 나의 한계를 인정해주자고. (얼마 못가 또 무리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많은 것들을 놓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되는 것들이
그런 것들이 생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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