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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햇 Aug 16. 2020

50여 일 장마의 기억

비와 함께한 시간과 공간


   길었던 장마가 끝이 났다. 비가 참 많이 온 장마였다. 한밤 중, 창을 때리는 빗소리에 깬 적도 있었다.

 한번 잠에 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르는데도 비가 어찌나 세차게 내리는지 깜짝 놀라 일어났다. 밖에 달린 실외기가 떨어져 나가겠다 싶었다. 길기는 또 어찌나 길었는지 무려 50일 넘게 계속됐다고 하니, 우중충하고 축축한 이 날씨가 지겹기도 지겹다.




   창 밖으로 흠뻑 내리는 비가 마냥 싫었던 건 아니었다. 집 안에 고요히 머무는 날에는 형광등 대신 작은 고양이등을 켜고 창을 따라 흘러내리는 빗줄기를 보는 기분이 좋았다. 밖은 난리통인데 안전한 곳에 있다는 안정감에 안락하기도 했다. 차분히 가라앉는 시공간 속에 편암함이 있었다.



   잠시 비가 그쳐 나가 본 길에는 온통 물, 물, 물. 수해가 왜 나는지 알 것 같다. 범람한 천의 흙탕물은 위협적으로 짙은 흙갈색이었다. 평소 온 동네 주민의 아침저녁 운동길이 되었던 동네 산책로가 침수되었다. 예전에 이 동네천에서 물난리로 인명사고가 났다고 들은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다. 언제 봐도 심란한 비주얼임은 분명하다. 지난 주말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며 보았던 논의 모습은 훨씬 더 처참했던 것 같다. 간간이 들려오는 인명피해 소식에 뜨악하기도 하며 새삼 물의 파괴력을 실감하는 시간이었다.


거의 장마기간 내내 범람해 있던 동네천.


  





    마냥 우중충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장마가 지속될 땐, 비올 때 하기 좋은 것들을 찾아 하게 된다. 가장 만만하고 좋아하는 건 책 읽는 것이다. 에어컨 빵빵하게 켜고 젤리 한 봉지 옆에 끼고 푸지게 앉아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오면 그만이다. 바깥에 비가 운치와 사색을 더해주는 BGM이 된다. 비 오는 날은 어쩐지 마음도 차분하고 책도 잘 읽힌다.


   바야흐로 유튜브와 넷플릭스의 시대라지만 영상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텍스트 기반의 콘텐츠- 이를 테면 책이나 브런치, 블로그 등을 읽는 게 익숙하고 재밌다. 영상은 시청각으로 동시에 들어오는 자극이 너무 많고 빨라서 생각하거나 소화할 틈이 없어 피로하고 정신이 없는 느낌이다.


젤리와 책



   책 읽는 방법은 많다. 혼자서 침대에 널브러져서 읽을 수도 있지만 함께 마주 앉아 읽을 수도 있다. 사실 무덥고 습하고 비가 올 때 아지트 없는 연인들이 할 수 있는 건 꽤나 제한적이다. 원래도 같이 책 보는 걸 좋아했지만, 비 오는 여름은 더할 나위 없는 배경이 되어준다. 장대같이 내리는 비를 뒤로하고 실내로 들어와 에그슬럿도 먹고, 카페에 가서 책을 편다.





   알랭 드 보통의 소설과 이름 모를 물리학 책이 테이블에 마주 놓인다. 알랭 드 보통의 애독자로서, 작가의 인사이트에 감탄을 늘어놓으며, 읽었던 내용이 얼마나 와 닿았고 큰 깨달음이었는지 이야기를 하다 보니 목이 조금 아프다. 그렇지만 목에 핏대 세우며 설파할 만한 내용이었다(고 아직도 감동 어린 채로 확신한다). 책 감상은 주저리주저리 나눠야 제 맛이다.



   다만 유일한 청중은 때로 지치고 도망가고 싶은 기색을 비치면서도 잘 들어준다. 어떤 부분에서는 동의를, 어떤 부분에서는 불만을 제기하기도 한다. 책 소감에 대해 한 3절까지 마치고 마지막 4절을 향해 가려던 찰나, 감동의 조잘거림을 제지당하고 조용한 독서의 시간으로 다시금 접어든다. 평온하고 아늑하다. 주중 고단했던 일과를 보상받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기나긴 장마가 끝이 났다. 힘듦이나 불편도 컸고, 한편으로는 비가 와서 할 수 있었던 좋은 것들도 있었다. 특히 한 동안 놓고 있던 책을 본 것이나, 글을 다시 쓰고 싶어 진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장마는 가고 볕과 함께 폭염이 고개를 내미는 어느 일요일 오후에, 길고 길었던 장마를 보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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