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랑 박사하러 같이 미국 가”
“오! 좋겠다. 미국 어디?”
“인디애나!”
“음? 그게 어디지?” or “아, 그 옥수수밭?!”
그렇다. 미국 인디애나주에 간다고 했을 때 반응은 두 가지, ‘그게 어디?’라는 반응과 미국 좀 안 다하는 사람들에게서는 가장 먼저 나오는 단어는 옥수수밭이었다. 시카고, 뉴욕,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등등 익숙한 이름들은 대부분 꽤나 큰 도시들이다. 인디애나는 이렇다 할 만큼 알려진 도시가 없는 주이고, 동부도 서부도 아닌 시카고 바로 아래 북동부와 중부 사이 그 어디쯤 위치한 애매한 곳이다. 실제로 와보니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시골스럽다.
그러나 불평할 것이 못되었다. 남편과 다른 전공으로 각자 박사 과정을 수학하고자 하였는데, 부부가 같은 학교의 입학 허가를 받기란 쉽지가 않다. 드문 확률이지만 정말 감사하게도 둘 다 각자의 길을 갈 수 있게 해준 유일한 학교였다. 하여, 시골이고 나발이고 우리는 그저 감사하고 감개무량한 마음으로 인디애나 블루밍턴에 왔다.
부푼 마음을 안고 호기심에 가득차서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짐을 풀고 동네를 거닐어보러 나왔다. 놀랍게도, 우리를 가장 먼저 반겨준 생명체는 사람이 아니었다.
슴생님 일가족이십니다. 첫째, 둘째 그리고 엄마 바로 이 사슴 일가족이 길거리에서 딱 우리를 반겨주는 게 아닌가? 별명 붙이기를 슴생님(사슴 선생님)이라 하였는데, 슴생님의 눈망울은 그 어떤 생명체의 그것보다 아름다웠으나, 처음 도착해서 무방비로 조우하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래 봬도 서울 태생, 근 30년을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만 살아온 도시 여자라서 사슴은 동물원에서나 보는 것인 줄 알았다. 같은 인도를 나란히 걷기에 아직은 우리 사이 조금 멀다.
처음에는 너무 무서웠으나, 진정을하고 천천히 슴생님들을 뵈니 마음에 조금 여유가 생겼다. 디즈니 캐릭터 밤비가 만화를 찢고 나온 듯한 비주얼에 설렜다. 저 등에 잔잔한 꽃무늬를 보아하니 꽃사슴인 것 같다. 슴생님들은 공평하시게도 한 집의 풀만 뜯는 게 아니라, 마을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여러 집의 풀들을 고루 뜯고 계셨다. 길도 잘 건너시는데, 슴생님들이 건너는 곳이 곧 횡단보도가 되는 것이다. 모든 차가 슴생님들을 위해 서행하고 멈춰 선다. 평화롭고, 마음이 어딘가 포근해졌다.
슴생님들과 공존하는 여기는 인디애나, 블루밍턴.
인디애나주 안에서도 머물고 있는 이 도시는 블루밍턴(Bloomington)이라는 작은 대학도시다. 인디애나 대학교가 위치하고 있어, 도시가 이 학교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현재는 여름방학이라 학생들이 없어서 매우 한적하다. 버스도 일요일에는 없을 정도다. 반면에 학기 중에는 상당히 북적인다고 한다. 도시 인구의 상당수가 학교 학생 내지는 교직원 혹은 교원이다. 집 계약 날짜가 조금 떠서 현재는 에어비앤비에 묵고 있는데, 이 집의 주인 역시 인디애나대학교의 교수가 방학 동안 에어비앤비로 내놓는 집이다. 학교 중심으로 돌아가는 작은 시골마을은 또 처음이라 신기하다.
집주인이 예술계열 전공 교수님이라 그런지 인테리어도 감각적이고 아름답다. 걸음을 내딜 때마다 ‘찌거덕-‘하는 나무 마루 바닥과 전반적으로 따뜻한 톤의 인테리어가 조화롭다. 편안하고 이완된 느낌을 주는데, 블루밍턴의 아늑한 시골 느낌이 집 안에 집약된 듯한 분위기다. 집주인이 된 것처럼 소파, 식탁, 조명 하나하나 조심스레 이용해 본다. 이 공간에는 특유의 시고르 감성이 있다. 필자는 감성파라 이런 느낌이 좋은데, 새침데기 도시인 남편은 그저 호텔이 좋은 모양이다. 그렇지만 군말 없이 따라 열흘 넘게 지내주니 고마운 부분이다.
볕 드는 날, 비오는 날 느낌이 사뭇 다르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아늑함이라는 키워드가 있는 집이다.
어려서부터 여행을 하게 되면 꼭 에어비앤비에 머물렀다. 사실 어려서는 돈이 없어서 그러기도 했지만, 현지인들이 사는 집 안이 그렇게 궁금하더라. 호텔은 어느 나라나 대충 다 비슷비슷해서, 호기심이 채워지지가 않는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놓고 살까? 어디서 어떻게 쉴까? 이런 게 늘 궁금한데, 현지인의 집 안에 입성해보면 어느 정도 머리에 그려지면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스팟 하나하나를 이용해 보면서 현지인 코스프레를 하는 것도 하나의 묘미다.
아침 일찍 일어나 커피 한 잔을 내리고 혼자 고요한 시간을 가지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집이다. 커피가 핑 돌기 시작하면, 글을 쓰거나 해야 할 것들을 찬찬히 처리한다. 급할 것 하나 없다. 무엇보다 ASMR이 참 좋다. 생전 들어도 보지 못한 종류의 새소리를 하루 종일 들을 수 있다. 새들이 도대체 몇 마리나 있을까 궁금해지는 시점이다. 하긴, 사슴도 나오는데 조류도감에 나오는 새들이라고 없을 리 없다. 창문을 열어놓고 작업을 하면 기분이 좋다. 서울에서는 작업할 때 유튜브에서 일부러 자연소리 ASMR을 켜고 했는데, 여기는 창문만 열면 24시간 자동재생이다. 중간광고도 없다.
한 가지 스스로 대견한 것은, 교환학생 하던 가닥이 있어서 그런지 타지에서도 헤매지 않고 곧잘 이것저것 혼자 찾아 한다는 것이다. 끼니도 잘 해결하고 있고, 생존 영어도 아쉬운 대로 쓸만하다-가끔 못 알아듣고 멍청한 소리를 하지만 정신건강을 위해 약간의 뻔뻔함 탑재는 기본이다. 잘 알아듣는 것은 네이티브의 몫으로 넘겨둔다-. 커피도 내려마시고, 식료품점을 찾아 과일과 신선채소도 사 와서 챙겨 먹는다. 구글맵으로 못 찾아갈 곳이 없다. 차가 없어 문제지만 두 발이 있어 괜찮다- 34도 더위에 차가 없어 12km를 매일 행군하고 있지만 말이다……. 사실 떠나오기 전에 두렵고 불안해서 유별나게 굴었었는데, 막상 나오니 스스로가 꽤 쓸만한 사람인 것이다. 왜 스스로를 나약하게 생각했을까? 스스로를 저평가하는 마음이 도전을 방해한다.
전혀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는 남편의 존재도 크다. 처음 교환학생을 갔을 때, 혼자 너무 긴장된 나머지 밤에 잠을 잘 못 자서 초반에 코피를 그렇게나 흘렸었다. 거의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흘렸던 것 같다. 생소한 환경에서 스스로가 안전한지 확신이 들지 않아 어린 마음에 많이도 두려웠다. 타지에서 서로 적응하느라 엄청나게 싸우고 있지만 그 존재 자체가 주는 안정감이나 안전감이 상당한 듯하다. 하지만 낯선 환경 속에서 감정을 표출할 대상이 서로 밖에 없어 사정없이 할퀴고 생채기를 내기도 한다. 서로 그만 할퀴고 든든한 팀이 되자……. 또, 13시간의 시차에 불문하고 실시간으로 연락해주는 친구들,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면 DM으로 계속 코멘트해주는 친구들 덕분에 계속 누군가와 함께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한평생의 둥지가 되어준 서울을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있다. 아침마다 고요한 시골의 ASMR 속에서 찬찬히 이곳 블루밍턴에서의 삶을 글로 남겨보려고 한다. 차근차근 한적한 이곳에서의 삶을 풀어내 보자. 잘 부탁해 새로운 둥지, 친하게 지내자.
마무리는 Bloomington 시골 사진전으로 첫 포스팅을 마감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