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 되기가 무섭게 나뭇잎들이 물들기 시작한다.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노란빛이 들기 시작한 게 새삼 눈에 들어온다. 한낮엔 여전히 덥지만, 그늘 아래 들어가면 어라, 꽤 선선하다. 계절이 바뀌려나보다. 낮에 운동하고 버블티 한 잔 들고 동네를 걸으니 하늘이 정말 예뻤다. 여름과 가을 사이 그 어디쯤, 날씨도 딱 좋은 9월이다. 초가을의 블루밍턴 풍경부터 눈에 담고 가자.
한국은 다가오는 태풍 때문에 긴장감이 감도는 모양이다. 가족들에게 전화를 했더니 아직까지는 영향권에 없다고 해서 다행이었지만 다음 주가 고비인 듯하다. 통화를 하다 보니 추석도 성큼 다가왔던데 모르고 있었다. 새삼 얼마나 먼 곳에 와있는지 실감했다. 여기선 추석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태풍 때문에 안부 전화를 건 가족에게 듣고서야 안 것이다, 바로 다음 주말이라는 사실을...!
서울에서는 역할과 도리, 의무도 많고, 챙겨야 할 행사 경조사도 많았다. 늘 얼굴을 맞대고 지지고 볶던 네트워크 안에서 외로울 틈 없이 지냈던 것 같다. 이곳 블루밍턴에서는 삶의 모양이 많이 심플해졌다. 무엇보다 역할과 도리로부터 잠시 가벼워질 수 있다. 한편으로는 그만큼 어떤 소속이 주는 안정감이나 복작거리는 맛이 없기도 하다. 삶에서 한 번쯤은 이렇게 오롯이 혼자 미지의 땅에 서있어 보는 경험도 유익한 것 같다.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관계 속을 헤집으며 사는 게 익숙했지, 중요한 다른 사람으로부터 떨어져 온전한 스스로를 관찰할 수 있는 게 흔한 기회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속도 없고, 챙길 사람도 거의 없는 이곳에서 나라는 사람은 무얼 하기를 선택하고, 무엇으로 하루를 채워가는지, 많은 시간들에 무슨 생각들을 하는지, 무엇을 중요시하고, 무엇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는지, 무엇에 자석처럼 이끌리는지 천천히 살펴보고 있다.
가난한데 여유롭고, 심심한데 평화롭다.
이곳에서의 마음 상태를 요약하자면 그렇다. 비자 때문에 일도 못하는 상황인데, 환율은 하루가 멀다 하고 올라서 금전적으로 꽤나 빡빡하다. 긴축 재정으로 인해 덜 사고 안 쓰고 있다. 그런데도 서울에서 돈을 벌며 살 때보다 마음은 더 여유롭고 편하다. 옷 좀 막 입어도 아무도 못 알아보고, 사람들이 서울처럼 예쁘고 세련되게 입고 다니지도 않는다. 사람들 따라서 그냥 맨날 운동복 입고 다닌다. 세상 편하다. 이게 바로 미니멀리스트의 삶인가 싶다. 이곳에 이주할 때, 안 그래도 옷이 많아도 너-무 많다고 느꼈다. 앞으로 많이 줄여가게 될 것 같다.
조금 심심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서울처럼 인스타 핫플레이스가 빠르게 생겼다 없어지지도 않고, 줄까지 서가며 플렉스 하러 가봐야 할 인생 맛집도 딱히 없다. 외식 물가가 서울보다 한참 비싸서 먹고 싶은 것은 되도록 집에서 요리하며 먹고 있다. 덕분에 블루밍턴 마스터 셰프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대신 풍요의 나라 미국인만큼 식료품의 종류도, 제품도 많아서 요리하기는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요리라곤 생전 안 하고 살았는데 막상 해보니 정말 재밌다. 요리하는 시간에는 완전한 몰입(Flow)을 느끼기 때문에 특히나 더 찾아 하게 된다.
심심해서 이것저것 해 본 요리들. 너무 재밌다.
요리는 재미도 재미지만, 감정 정화에도 꽤나 도움을 많이 주었다. 처음 입주했을 때, 하루는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가 고장이 나서 한 시간 넘게 씨름을 하고, 그다음 날은 커피 메이커가 고장이 나서 또 씨름을 한 적이 있었다. 안 그래도 입주 노가다하느라 많이 지쳐있었는데, 날마다 문제가 생기니까 너무 화가 났었다. 그때마다 복잡한 요리들을 했더니 희한하게 그 좌절감은 싹 잊히고 뿌듯함만 남았더란다.
집중해서 씻고, 다듬고, 순서를 잘 조직해서 동시에 여러 가지 요리를 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다 보면 손발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 머리와 손을 총동원해서 예쁘게 식탁을 가득 채우고 만다. 맛있는 음식으로 기분을 달래고 나면 몸도 따뜻하고, 배도 부른 게 다시 도전 못할 일도 없을 것만 같다. 내 손으로 가족의 식사를 책임졌다는 게 내심 뿌듯하고 기특하기도 하다. 열받게 했던 일들을 잊고 스스로 해낼 수 있음을 계속 상기하는 신성한 의식이다.
한국에서도 가장 좋아했던 예능 중 하나가 삼시 세끼 시리즈와 슬기로운 산촌생활이었다. 본의 아니게 미국에 와서 삶으로 실현 중이다. 삼시 세끼를 보면서, '무슨 밥 세 끼 해 먹는 게 저렇게 일이며, 그걸 또 지켜보는 건 뭐 이리 재밌지?' 늘 생각했었는데 그게 정말 일이다. 생각보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노동집약적인 일이 바로 해 먹는 일이었다. 대충 먹으려면 또 노력 없이도 충분히 먹을 수 있는데, 제대로 해 먹으려면 한도 끝도 없는 게 바로 집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마저도 치열하고 바쁜 삶 속에서는 어림없었을 것이다. 한가롭고 평화로운 시골 바이브이기에 가능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석양이 예쁘던 날 하늘
의도치 않게 미국의 한적한 블루밍턴으로 오게 되면서 어쩌다 미니멀리스트가 되어가는 중이다. 심플하게 돌아가는 일상이 여전히 생경하지만, 어딘가 마음이 편하고 좋기도 하다. 타지에서 생활하는 게 마냥 쉽지는 않았지만, 또 이곳에서만 누릴 수 있는 여유로움과 평화도 충분히 만끽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