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한국의 가족이나 친지, 친구들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노라면 외로움이 문득문득 불청객처럼 찾아오곤 한다. 물론 외로움을 상당 부분 덜어주는 남편이 있어 그나마 이 정도 생활하고 있는 듯하다. 그치만 개인적으로 감정적으로 예민한, 혹은 섬세한 성향이며(공평하게 긍정과 부정어를 모두 썼다), 친밀감의 욕구가 크기 때문에 아무래도 해외에 나오니 외로움을 더 자주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유학생들이나, 유학생 가족들 중에서도 외롭고 울적한 감정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고 들었는데, 직접 겪어보니 더 이해가 된다. 기본적으로 고향의 인적 네트워크도 없을뿐더러, 집 밖에만 나가면 온통 이질적인 사람들과 문화, 언어 천지라 존재만 해도 문득 외로울 때가 많다. 이곳에서 감사하게 만난 인연들도 존재하는데, 각자 해외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들에 충실하다 보면 기본적으로 혼자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다.
해외 생활 중 외로움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인 만큼, 스스로에게 더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줘야 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외로움 자체를 없애려거나, 피하려고 하기보다는 외로움을 견디는 스스로에게 더 잘해주는 게 실제로도 도움이 많이 되고 있다. 미국에 살면서 스스로 외로움을 안고 뒹굴며, 어르고 달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오늘은 특별히, 외로움에 혼자 뒹군 나날들에 대한 기록이다. (외로움을 달랜 혼자 만의 대처방략도 함께다.)
때는 바야흐로 금요일. 이른 아침부터 빡빡한 연구 미팅을 마치고 나왔다. 영어로 진행되는 연구 미팅에서 못 알아듣거나, 놓치지 않으려고 두 시간 내내 한 시도 정신을 놓지 못하고 바짝 각성해 있었다. 혼자만 외국인이었던지라, 멍청해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미팅을 마치자, 긴장이 훅 풀리면서 피로가 몰려왔다. 꽃샘추위에 비까지 내려 날이 어찌나 추운지 차에 엉덩이 히터를 켜고 가장 좋아하는 태국 음식점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이라 다들 삼삼오오 모여 식사를 하러 왔다. 미국인들 틈바구니에 혼밥을 하려니 역시나 조금 머쓱하고 외로웠으나, 스스로에게 따뜻한 국물이 넘실대는 진한 소고기 쌀국수를 사주고 싶었다. 이 가게의 쌀국수는 한국의 '쏘이연남'이라고, 소고기 쌀국수를 맛있게 하는 집과 맛이 상당히 비슷하다. 한국에서는 줄 서서 먹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양도 1.5배나 되는 것을 줄 없이도 먹을 수 있다. 음식이 나오고 국물을 한 입 크게 먹으니, 크아-. 온몸이 따뜻해지면서 사우나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혼자 감탄을 반복하며, 온몸이 후끈해질 때까지 쉴 틈 없이 먹었다.
사람은 역시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과, 삶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시간이었다. 오늘 미팅에서 교수님이 원하던 것을 잘 구현해 내지 못해서 속상했지만, 미팅 내 온 힘 다해 집중하느라, 또 한 주 알차게 사느라 고생했다, 나 자신.
이윽고, 주말이다. 남편은 바쁜 일정으로 오늘 함께하지 못했다. 혼자 느지막이 일어나서 점심시간을 한참 넘긴 한적한 시간에 겨우 씻고 나갈 채비를 했다. 요즘 한국 명랑 핫도그, 그것도 감자가 박힌 핫도그가 너무 먹고 싶었다. 블루밍턴에서는 파는 곳이 잘 없어서 혼자 서칭을 엄청 해서 한 군데를 겨우 찾아냈다. 차를 끌고 바로 출동했다. 처음 가본 가게였는데 뷰도 너무 아름답고, 분위기가 참 좋았다.
얼그레이 버블티와 감자 핫도그를 주문하고 기다렸다. 버블티는 미디엄 사이즈를 주문했는데, 미디엄 용기가 없어서 그냥 라지 사이즈로 줬단다. 예상 못 한 행운에 기분이 좋아졌다. 따끈따끈 갓 튀긴 핫도그와 행운의 버블티를 가지고 창가 뷰가 제일 예쁜 자리에 앉았다. 감자 박힌 하프앤하프 핫도그는 언제 먹어도 너무 맛있다. 맛있는 것들로 요기를 하니 기분이 좋았다.
이것이 바로 주말이지.
감자 핫도그의 치즈를 길게 늘려 뜯으면서 경치를 감상했다. 이런 아기자기한 풍경을 좋아해서, 핫도그와 음료를 다 먹고도 한참을 창밖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한편으로는 누군가와 이런 감성과 시간을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문득 외롭기도 했다. 대문자 E라서 그런지, 예쁘고 좋은 것을 보면 함께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렇지만 뭐, 혼자면 어떠하랴! 혼자 먹어도 맛있는 것은 맛있고, 예쁜 것은 예쁘다!
좋아하는 종목 운동을 하는 것도 삶에 소소하게 활력을 불어넣는 데 도움이 많이 된다. 한국인 네 명이서 무리를 지어(?) 함께 주에 1번, 2시간 씩 매주 테니스를 치고 있다. 학과 내에 한국인이 거의 없는지라, 일과 내내 영어와 미국 문화권 사람들과 부대끼다가 이렇게 한국인들에 둘러쌓여 모국어를 쓸 때 너무 편하고 행복하다. 테니스 공을 세게 치며 언어와 문화 장벽에서 오는 소외감을 잊으려 애써본다.
기온이 많이 올라가는 날에는 수영장에 간다. 미국 대학교 수영장은 시설이 너무 좋다. 서울에서는 한 레인에 열 명씩같이 쓸 때도 있는데, 이렇게 큰 수영장에 사람도 거의 없어서 갈 때마다 1인 1레인이 국룰이다. 서울의 복잡스러움에 익숙한 한국인이라면, 혼자 레인을 다 차지하는 사치는 꼭 한 번 누려봄직하다.
수영을 하고 나면 기분전환이 많이 되고, 샤워까지 마치고 나면 정말 개운하다. 외롭고 울적할 때에 사실 혼자 침대에만 있는 것이 제일 편하지만, 따스한 날 한 번씩 몸을 이끌고 나와서 무슨 운동이든 하고 나면 마음도 가벼워지고, 생각도 한결 긍정적이게 된다.
꽃이 예쁘게 피는 봄이다. 홀로 맞이하는 아침은 꽃 가까운 테라스에서 베이글과 커피로 연다. 음악도 틀고 커피도 마시며 바삭하게 구운 베이글을 천천히 음미한다. 혼자 먹더라도 대충 막 먹지 말고, 달달하고 고소하게 잼과 크림치즈를 잔뜩 바르고 커피도 갓 내린 신선한 것으로 먹으려고 한다. 요즘 꽃이 너무 예쁘게 피어서 테라스에서 보내는 시간에 눈이 아주 즐겁다.
옛 선비들이 왜 자연을 벗 삼아 그렇게 시들을 써 내려갔는지 알 것도 같다. 그들도 외로웠던 것이다. 덕분에 고등학생 때 배우느라 아주 고생했습니다요, 선비님들. 혼잣말도 중얼거려보고, 노래도 흥얼거리며 해외생활의 반려자인 외로움과 적적한 시간을 보내본다.
테라스에서 시간을 보낼 때 제일 많이 만나는 친구다. 부리가 샛노란 색이라 너무 귀엽고 신기하다. ASMR에 나오는 꼭 그런 교과서 같은 새소리를 내는데 이 친구, 말이 어찌나 많은지 모른다. 이래서 말을 많은 사람을 보고 참새, 촉새, 종달새 등등 각종 새를 붙여 부르나 보다. 실제로 보면 노란색 부리가 잔디 위에서 더 쨍-하고 눈에 띈다. 한국에서는 영 못 보던 친군데, 이름이 뭐니?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집 뒷마당에 안주인은 이 노란 부리새지만, 청솔모도 꽤 많고, 드물게는 사슴이 올 때도 있다. 혼자 멀뚱히 앉아 있자니 동물 친구들이 눈에 그렇게 들어온다. 다들 참 무해하고 귀엽다.
혼자서 테라스에서 별 짓을 다 하는데, 옥수수도 쪄서 신나게 먹는다. 인디애나 하면 또 옥수수밭 아니겠는가? 옥수수가 정-말 달고 맛있다. 한적한 느낌을 즐기며 테라스에서 간식을 먹는 것이 낙이다. 다만 꽤나 자주 신나게 옥수수 하모니카를 부는 중에, 저 앞집의 뒷문으로 사람이 나와 눈을 마주칠 때는 조금 민망스럽다. 옆집 사람이 테라스에 나올 때도 있다. 너무 열정적으로 씹고 뜯고 맛보는 모습은 보이기 조금 그렇다. 멋쩍어서 후다닥 들어온다.
나 홀로 피크닉도 빼놓을 수 없다. 따뜻하고 햇살 좋은 날이면, 캠퍼스 잔디밭에는 미국 아이들의 피크닉의 향연이 펼쳐진다. 올림픽공원의 딸로서, 피크닉은 양보 못한다. 혼자여도 질 수 없다. 돗자리 펴고, 딸기 크림 프라푸치노 하나 끼고 드러누우면 되는 거다.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며 혼자 한참 멍도 때리고, 책도 읽고, 경치도 감상하고, 음악도 듣는다. SPF 70짜리 선크림을 꼼꼼히 바르고 햇살 아래 잠시 누워있으면, 몸도 마음도 폼폼하니 따사롭다. 비타민D가 퐁퐁 합성되고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혼자만의 피크닉을 즐겨본다. 사진도 찍고, 아이패드로 책도 보며 외로움을 벗삼아 본다.
대체로 외로움 끌어안고 아기자기하게 지내다가도, 외로운 영혼들끼리 모국어 쓰며 만나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친구네 집에 가서 한국말로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 혼자서 외로운 시간들을 견디다 보면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 비로소 소중함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서울에서는 반대로 챙겨야 할 사람, 관계, 예의, 도리가 많아서 힘들었다면, 해외에 나와서는 혼자서 보내야 하는 시간과 외로움이 어려운 점이다.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친구와 사는 얘기를 한참 풀어놓다 보면, 위안도 얻고 마음이 한결 따뜻해짐을 느낀다. 그치만 각자의 인생이 또 달리 있는 법. 쌓인 한을 어느 정도 풀었다면, 또다시 씩씩하게 혼자 살아갈 힘을 얻어 온다.
다시 또 힘을 내보는 혼자만의 시간이다. 날씨 좋은 날, 학교에서 가장 예쁜 야외 자리를 차지하고 공부나 연구 일을 한다. 외로움은 생산성을 끌어올리기에 가장 좋은 동력이다. 외로울 때 블로그 글도 가장 잘 써지고, 다른 데 영향을 받지 않고 일이나 공부에도 매진하기도 좋다. 때때로 공부나 일이 외로움을 잊게도 해주기 때문에 흠뻑 집중해서 빨려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다. 주중에는 이것저것 급한 일들을 처리하다 보면 외로움을 잊을 때가 많다. 다들 비슷하겠지만, 멈춰있을 때 외로움은 가장 두드러지게 느껴진다.
그렇게 정신없이 공부와 일로 일과를 보내고 나서 집에 도착하면 잠시 쉬었다가 저녁을 준비한다. 근래에는 쉽게 만들어서 먹을 수 있는 한 그릇 음식을 주로 요리한다. 그날그날 제일 먹고 싶은 것을 만든다. 어릴 때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직장을 다닌 이후부터 맛있게 해서 먹는 집밥이 하루의 큰 위로가 된다. 스스로 맛있고 좋은 것을 먹이기만 해도 '잘 먹고, 잘 사는 것'에서 50%를 달성하는 것이니,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말이다.
딱히 사진으로 남기지 않아 아쉽지만, 에너지가 없는 날은 집에서 혼자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일도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주로는 밖으로 많이 나도는 성향이라 바깥에서 외로움을 달래며 씩씩하게 살아가려 노력하지만 때때로 한 번씩 힘이 없을 때는 침대와 한 몸이 되어 무력하게 지내기도 한다.
그럴 때가 있어도 괜찮다
며칠을 그러고 있을 때도 있다. 그렇지만 에너지를 충전해서 다시 힘을 내서 운동도 다녀오고, 밥도 해먹고 그러면 된다. 다만, 유튜브 알고리즘에 빠져서 탐닉하거나 가상의 세계에 살다시피 하지는 않도록 경계하려고 한다. 앞으로도 해외에서의 삶이 녹록지 않겠지만, 외로움을 끌어안으며 견디는 스스로에게 더 친절하고 정성스러울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