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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햇 Nov 26. 2022

버스조차 없는 미국 시골의 연휴, 그리고 이방인

위로와 나눔의 정신, Thanksgiving


   미국 Thanksgiving 휴일 주간의 블루밍턴은 마치 영화에서 인류가 버리고 간 마을을 보는 것 같았다. 제각기 가족들의 품으로 떠나 마을 전체가 텅텅 비었다. 그리고 그 마을을 혼자 지키는 외로운 사람 - 나야 나 바로 나!-. 거리엔 버스도 없고, 차도 없고, 사람도 없어서 신호등이 무의미할 정도였다. 찻길로 걸어 다녀도 되겠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침묵과 고요만이 내려앉은 동네를 산책하자니 기분이 오묘했다. 유난히 쓸쓸하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주간이었다.

아무도, 아무것도 없다


  다른 유학생들도 찾아갈 가족은 없을지언정, 이 주간을 이용해 여행을 많이 떠났다. 저렴한 항공권을 각기 지혜롭게 찾아 다녀오는 것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를 부러움이 들었다. 어디 가 볼 생각도 못 했고, 사실 그럴 수도 없는 처지지만 괜스레 쓸쓸하고 외로운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내년에는 부디 이 시기에 꼭 여행을 가리라 다짐해 본다.



  씁쓸한 마음을 안고 뭐라도 해볼 겸 도서관으로 향했다. 사실 할 게 많은데, 어려운 과제라 부담감이 들어서 자꾸 미루고 있었다. 회피나 지연을 제일 싫어하는지라, 스스로를 집 밖으로 내쫓았다. 어제는 추수감사절 당일인 줄도 모르고 30분을 걸어 도서관을 갔다가 굳게 닫힌 문에 상처를 받고 헛걸음을 돌려 집으로 왔다. 오늘은 여는 날인 것을 확인하고 출발했다. 괜스레 헛헛한 마음을 커피로라도 채우려고 가는 길에 집 앞 커피숍에 들렀다. 제일 좋아하는 라테를 평소 다 먹지도 못하는 라지로 주문해 보았다. (아, 참고로 미국의 라지는 한국의 라지와 많이 다르다^^) 역시 마음의 빈자리는 음식으로 채우는 것인가 혼자 생각했다.


   커피를 주문하던 중, 계산을 하려고 지갑을 꺼내는데 갑자기 캐셔가 "오늘 네 커피는 공짜야!"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무슨 뜻이야?"라고 되물었더니 "앞선 손님이 뒷사람을 위해 커피값을 계산하고 갔어"라고 했다. 예전에 미국에 이런 문화가 있다고 들었는데 내가 당첨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첨 운이 영 없는 편이라 요행을 바라본 적이 없건만, 꿀꿀하던 기분에 한 줄기 미소가 번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예상치 못한 소소한 행운이 얼마나 기분 좋은 것인가 새삼 느껴보았다.



   고마웠다. 가장 큰 명절에 가족도 가까이 없고, 놀러도 못 가는 처지에, 할 것과 부담감만을 이고지고 도서관에 가던 중 공짜 커피 한 잔을 얻게 될 줄이야.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받은 위로 한 잔을 움켜쥐고 도서관에 왔다. 어제는 도서관 가던 길도 영 우중충하고 을씨년스럽더니 오늘은 괜스레 밝고 명랑한 것만 같다.




   도서관은 역시 한적했다. 도서관에 도착해서 자리에 앉기 전 결연한 마음으로 화장실부터 들렀다. 화장실 문을 여는데 웬 여학생 한 명이 히끅히끅 어깨를 들썩이며 서럽게 울고 있는 게 아닌가? 들어오는 나를 보고는 서둘러 칸으로 들어가 버렸는데 무슨 사연으로 도서관에서 저렇게 서럽게 울고 있는 건지 괜스레 마음이 안 좋았다. 볼 일을 보면서 오늘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받은 위로를 나도 누군가에게 또 전해줘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가서 괜찮냐고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건네볼까 고민하던 찰나 그 아이가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볼 일을 마치고 나갔을 때는 그 아이는 없었다. 괜히 기회를 놓친 것 같아서 마음이 안 좋았다.


   가버린 것을 어쩌겠나 싶어 단념하고 앉을 자리를 찾아 배회하던 중, 화장실에서 울던 그 아이를 열람실에서 다시 마주쳤다. 서로를 알아봤지만 뭔가 민망하고 머쓱한 기류가 흘러 일단은 못 본 척하고 지나갔다. 할 일을 좀 하다가 도서관을 떠나기 전, 초코바를 하나 사서 슬금슬금 다가가 말을 걸었다. 보려던 건 아닌데 화장실에서 우는 걸 보고 마음이 안 좋았다고 운을 떼며, 오늘 운 좋게 공짜 커피를 받았는데 너에게 작은 마음으로 또 나누고 싶다고 전했다. 커피를 샀으면 좋았겠지만 추수감사절이라 아무 데도 열지 않아 급한 대로 자판기 초코바 밖에 못 사서 아쉬웠다.


    울었던 친구는 정말 듣던 대로 미국 리액션을 선보이며, 고맙다고 하며 기쁘게 받아주었다. 이 나라 리액션, 역시 크고 진하다. 포옹까지 해주었다. 다소 과격함에 얼떨떨했지만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면서 어쩌다 보니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되었다. 힘들게 살지만 정말 강인한 친구였다. 그러면서 서로 무슨 공부를 하는지 묻다가 하필이면 또 같은 전공인 것을 알게 되었다. 반가움에 이메일 주소를 교환하고 헤어졌다. 따분하고 외로웠던 휴일이 조금은 재밌고 설레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 친구에게서 바로 메일이 도착했다. 빙그레 웃음이 났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커피값을 미리 지불하고 간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 사람 덕분에 우중충했던 하루가 밝고 따뜻해졌는데, 고마운 마음을 전할 길이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그 사람은 이런 결과를 상상했을까? 이게 바로 미국 Thanksgiving의 정신일까? 별의별 생각이 꼬리를 물며 지나갔다. 미국에서 색다른 경험을 또 해본다. 참 재밌는 나라다. 오늘 하루,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집 밖으로 나와 뭐라도 하려던 의지가 만들어낸 결과인 것도 같아서 기쁘고 기분이 좋다.



    값비싼 칠면조 요리는 구경도 못했을 지언정, 값진 Thanksgiving의 나눔을 제대로 경험해본다. 오늘도 따뜻하게 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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