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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햇 Nov 07. 2022

저렴한 사람이라 유익했던 하루

가성비 좋은 행복도 썩 괜찮다.


  서머타임이 끝났다. 그간 13시간 나던 시차가 14시간으로 늘어났다. 아침에 1시간을 더 자도 된다는 뜻이다. 서머타임이 종료되는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알람도 없이 푹 잤다고 생각했는데 일어나 보니 9시 밖에 안됐다. 기존대로라면 10시였을 것이다. 괜스레 부지런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하루를 더 보람되게 보내고 싶어졌다. 푹 자서 개운한 몸을 이끌고 아침 일찍 운동하러 나갔다.


  알싸하게 차가운 공기가 플리스를 송송 뚫고 들어온다. 아직 한낮에는 반팔을 입고 다닐 정도로 따뜻하나, 아침저녁으로는 확실히 춥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11월은 11월이다. 그렇지만 블루밍턴이 서울보다는 확실히 따뜻한 것 같다. 호다닥 차로 뛰어달려가 스포츠센터로 향한다. 운동은 오고 갈 때 차를 타는 것이 진리다. 주차는 센터 입구와 무조건 제일 가까운 곳에 하는 것도 잊지 말자(?).


   그룹 운동 중 최애 세션인 파워 빈야사 요가에 갔다. 이 요가 클래스는 언제 가도 인기가 많다. 자주 가서 맨 앞에서 열심히 따라 한 나머지 Lauren 선생님과 안면도 텄다. 이 선생님 요가 수업의 트레이드 마크는 긍정 확언이다. 한 시간 동안 자세를 배우는 중간중간 '나는 이미 충분하다', '나는 잘하고 있다', '나는 내 몸을 사랑한다'라는 확언을 세뇌 받고 나면, 수업을 마칠 때쯤에는 삶을 엄청 잘 살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마법이다. 참여해 본 그룹 세션 중 수강생이 꾸준하게 제일 많은 수업인데, 어쩌면 다들 Lauren 선생님의 마법이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요가 수업에 들어가기 전 달리기와 근력운동까지 했던지라, 수업을 마치고 나니 굉장히 허기졌다. 일주일에 한 번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버블티를 마시러 갔다. 가는 길부터 늘 설렌다. 블랙 밀크티에 쫀득한 펄을 넣은 버블티는 언제 마셔도 극락이다. 차를 가게 근처에 세우고 버블티를 픽업하러 가는데 세상에, 날씨랑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늦가을의 따스한 볕을 즐기는 사람들이 캠퍼스 풀밭에 아무렇게나 돗자리를 깔고 누워있다. 버블티만 살짝 테이크아웃해가려고 하였으나, 이 볕과 풍경을 보니 그 일부가 되지 않고는 지나치기 어려웠다.


   바로 옆에 학교 피자집이 있어 저렴한 가격에 치즈 피자 한 조각을 사와 볕에 앉아 먹었다.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굳-이, 구태-여 밖에 나와서 먹고 싶은 그런 날 말이다. 길 한복판에 벤치에 철퍼덕 앉아 고즈넉한 가을 풍경과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느릿느릿 피자와 버블티를 먹었다. 참, 행복이 별건가? 싶었다. 미국에서는 길바닥에서 음식을 먹는 것도 자연스럽고, 남들이 뭘 하건 신경 쓰지 않아서 덩달아 자유로워지는 것 같다. 각자 원하는 대로 존재하며 이 계절을 즐기면 그만이다. 혼자서 그렇게 한참 풍경을 눈에 담고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이 날씨와 바이브가 아쉬워 테라스에 나와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있다. 스스로 저렴한 사람이라 유익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행복하기 위해 그렇게 큰 노력과 돈이 필요치 않다는 뜻이다. 따뜻한 공기, 쨍한 햇살, 가을 낙엽, 버블티 한 잔, 치즈 피자 한 조각, 요가 수업, 테라스의 바람 한 조각 이런 것들로 행복 게이지를 채우기에 충분하다. 어쩌면 아직 플렉스 하는 즐거움을 몰라서일 수도 있다. (한 번쯤은 그 맛을 보고도 싶다.) 어차피 플렉스 하지도 못하는 형편인데, 행복이라도 저렴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돈도 얼마 들지 않는 이 즐거움들을 놓아 줄 생각이 없다.



적어도 한 주에 하루 쯤은 이렇게 평온하고 즐거워봐도 좋겠다. 더 많이 보고, 걷고, 다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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