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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는 글

~ 시공을 초월한 공감 ~

by 강신옥

사람은 시공을 초월해서 같은 생각을 하며 살 수도 있나 보다.

전혀 모르는 사람과 표현은 달라도 같은 내용의 글을 쓰기도 하기 때문이다. 멀리 떨어져 있고 서로 모르는 사이인데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공감’은 가슴 두근거리는 감동이 아닐까! 하지만 시공을 초월한 공감이라는 기쁨보다 오해받을까 봐 불안해지는 이 불편한 진실!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에게 편안함과 떳떳함을 주는 것은 사실보다 진실이었디.



언젠가 ‘산책도 책이었다.’라는 글을 썼다.

산책을 할 때마다 ‘책’ 글자가 붙는 것부터가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인지 걸으면서 책을 읽고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주부이기에 활동이 주로 주방일 때가 많은데 산책을 나서면 시선이 일단 주방, 거실, 살림살이들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시선이 어디에 머무느냐에 따라 생각도 따라가기 마련이다.


집을 잠시나마 잊게 된다.

산책 길 나서면 하늘부터 쳐다보게 된다. 맑은 하늘과 흘러가는 흰구름을 보며 잡다한 생각들이 사라지며 마음이 여유로워진다. 초록으로 이어지는 숲길을 걸으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몸으로 느껴지는 청량함에 마음까지 맑아진다. 군데군데 피어있는 갖가지 모양과 색깔의 야생화들을 보며 발길을 멈추고 쉬어간다. 소리 없이 피고 지는 꽃들과 눈길을 주고받으며 굳어진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걷다 보면 오래된 한옥 마당에는 집집마다 개가 있다. 자주 만나다 보면 우리 개는 아니지만 지나갈 때마다 안부가 궁금해서 챙겨보게 된다. 그중에는 ‘강산’이라고 부르는 인자한 할아버지 분위기의 진돗개도 있었다. 단골손님을 맞이하듯 꼬리를 흔들며 아는 척해주니 오는 정 가는 정이 들었다.

가끔씩 시원한 바람까지 마음 항아리를 비워주고 간다. 바람과 함께 산책을 하고 돌아올 때면 덕지덕지 붙은 삶의 찌꺼기들이 어디론가 날아가고 마음도 몸도 가벼워져서 돌아온다.


산책은 자연이라는 책을 읽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산책을 통해 비워진 가벼움과 채워진 뿌듯함이 느껴졌다. 산책의 여운이 가시기 전에 노트북을 열고 ‘산책도 책이었다.’라는 글로 산책길을 되돌아가 보았다. 글을 발행하고도 산책을 한 듯 기분이 좋았다.

그날, 하루 일과를 마친 늦은 밤, 파란 신호등이 켜진 브런치 댓글 창을 열었다. 얼굴은 모르지만 공감의 댓글을 보며 감사의 답글을 쓰다가 깜짝 놀랐다. 황당했다. 내 글 속에 등장한 ‘강산’이라는 개 이름과 같은, 정말‘강산’이라는 작가님의 댓글이 있는 것이 아닌가. 거기다 더 기가 막혔던 것은 그분도 산책을 책이라 쓴 자작시를 댓글로 올려놓으셨다.


알고 보니 작가님은 글쓰기에 이미 프로 수준이었다. 내가 워낙 시를 잘 읽지 않는 편이어서 작가님도 시도 초면이었다. 책을 두루두루 읽지 않은 나의 무식의 소치였다. 놀랍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유명한 작가님을 몰라보고 개 이름으로 붙였으니 미안하기도 하고 진심으로 송구스러웠다. 고의는 아니지만 비슷한 내용의 글을 쓰게 된 것에 대해 답글을 쓰긴 했지만 나의 말을 정말 믿어줄까 불안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날 밤,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진실은 누구보다 나 스스로가 가장 잘 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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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의 상황도 있었다.

‘그냥 문득 생각나서 해봤어’라는 글을 발행했을 때였다.

어떤 작가님이 나와 같은 주제의 글을 써놓고 수정 보완해서 다음 날 발행하려던 참이었는데 같은 내용의 나의 글이 올라왔다고 했다. 내용이 흡사해서 오해받을까 봐 걱정을 하시는 것이었다. 이미 앞에서 경험한 바가 있었기에 그 작가님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라 믿어졌다. 아무 걱정 말고 발행하시라고 답을 보냈다. 다음 날 작가님의 글을 보면서, 시공을 떠나 있지만 비슷한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더 깊은 공감을 하며 전혀 개의치 않았다. 기꺼이 기쁨의 댓글로 공감을 했다.



비슷한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었다.

브런치를 하면서 사진을 찍는 습관이 생겼다. 직장 생활할 때는 사진은 기념식이나 행사, 특별한 상황에서나 사진을 찍었다. 평소에는 사진 찍는 것을 잊고 살았다. 브런치에 글을 발행하면서 부족한 기술이지만 그저 내가 찍은 사진을 쓰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주로 산책하면서 만나는 경치나 나무, 꽃 사진을 찍으면서 깨닫는 것이 있었다. 눈앞에 있는 꽃이나 나무가 좋아서 막상 스마트폰 카메라를 대고 보면 화면에는 미처 내가 생각지 못한 배경이 눈에 거슬려서 사진을 포기할 때가 있었다. 모르고 사진을 찍었지만 확인해보면서 예쁜 꽃이 핀 땅에 잡초나 쓰레기가 깔려 있을 때도 있고 멋있는 나무를 찍었는데 어울리지 않는 건물이나 지나가는 사람이 찍혀서 사진으로 쓰지 않고 삭제해야 할 때도 있었다.


배경도 무시 못할 중요한 조건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배경이 되어 주지 못하고 선택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지 나를 돌아보았다. 금수저까지는 못되어도 나도 좋은 배경이 되어 주고 싶었다. 어떤 구름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하늘 배경이 부럽다는 글을 썼다. 바쁜 일이 있어서 퇴고를 미루고 있던 어느 날 브런치 추천글에 딱 그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참 공감이 갔다. 하지만 뒷북을 치며 나도 썼노라며 글을 발행할 수가 없었다. 서랍에 넣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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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란 분명 각자 각자 혼자 자기만의 공간에서 쓰는데, 표현은 달라도 얼마든지 같은 내용이 나올 수도 있었다. 누구에게나 기본적으로 ‘희로애락 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이 자리하고 있어서일까! 감정이 비슷하니 같은 내용의 글이 나온다는 것이 그리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사람이란 다른 듯 같고 같은 듯 다르기에 표현은 다르지만 얼마든지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 이제 그리 이상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세상 수많은 작가님들의 글을 다 피해서 글을 쓸 수도 없을 것 같다. 사실은 시공을 초월한 공감의 글에 우연의 일치라는 기쁨을 느껴야 하지 않는가!


다만 어떻게 같은 내용의 글을 쓰게 되었는지는 각자 양심과 진실의 문제일 것이다. 양심과 진실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잘 안다. 떳떳하다면 곧 자유로울 수가 있고, 부끄럽지 않다면 여전히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는 것 같다.



먼저 쓰든 나중에 쓰든 뛰어난 글은 쓰지 못해도 언제나 마음 편히 잠자리에 들 수 있는 글을 쓰며 살기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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