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위에 다시 눈이 쌓였다. 빙판 길이 예상되어 외출을 삼가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은행을 다녀와야 했다. 시골을 다녀오면서 카드를 분실해서 체크카드로 바로 재발급을 받기 위해 은행을 직접 방문해야 했다.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할까 봐 얼어붙은 눈을 피해 한 발 한 발 조심조심 걸었다. 완전 거북이걸음으로 겨우 은행에 도착했다.
눈이 온 탓인지 손님이 별로 없었다.
번호표 뽑자 바로 호출되어서 창구로 갔다. 눈길을 걸어온 긴장을 풀 사이도 없이 차례가 되었다. 용건을 말하고 은행원이 요구한 신분증을 꺼내고 있을 때
“길이 미끄러워 오시느라 힘드셨지요?”라는 창구 직원의 인사말이 벌써 남달랐다. 업무상 말 이외에는 쉽게 나올 수 없는 그 말 한마디에 얼어붙은 눈길을 걸어온 긴장이 풀리며 마음이 푸근해지기 시작했다.
신입사원 분위기가 나는 젊은 남자 직원이 나를 마치 부모 대하듯 했다.
카드 재발급을 하면서 내가 요청하지 않은 여러 가지를 살펴주며 챙겨주었다. 그동안 신용카드 사용으로 쌓인 포인트를 현금으로 통장에 입금도 시켜주고, 통장정리도 해주고 내 스마트폰에 카드 앱도 깔아서 수시로 확인 가능하게 직접 앱을 설치해 주기도 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은행직원은 내가 미처 챙기지 못했던 몫을 두루두루 확인하며 챙겨주었다.
이 바쁜 세상, 아무리 손님이 별로 없는 시간이라 해도 고객이 요청한 것만 하면 끝날 일일 텐데 알아서 서비스를 해주니 고맙기 그지없었다. 직원이 업무를 하는 동안 영업점과 직원의 이름을 슬그머니 메모를 했다. 고마움을 그냥 흘려보내기 아까웠다. 기억해주고 싶었다. 업무가 끝나고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니 은행직원은
“아닙니다 당연히 해드려야지요.”라며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대답이었다. 은행을 나오면서 그 은행원의 말이며 친절이 참 인상적이고 고마움의 여운이 길었다.
같은 길인데도 은행을 갈 때와 세상이 다르게 느껴졌다. 한결 마음이 여유로웠다. 한파 속을 걸으면서도 어디선가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는 듯했다.
친절한 은행원을 만나고 나니 미처 보이지 않던 길이 눈에 들어왔다.
제설작업을 해 준 길, 염화칼슘이 뿌려진 길, 집 앞에 눈을 치워준 길, 아파트 곳곳에 눈을 쓸어서 내어준 길……등 누군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며 수고해서 만들어 준 길이었다.
누군가 당연히 할 일이라며 해주는 최선이 온기가 되어 한파도 이기고, 삶에 동력이 되니 세상은 여전히 살만한 곳인가 보다.
집에 돌아와, 눈처럼 녹아버리거나 얼어버리기 전에 노트북을 열어 칭찬코너에라도 글을 올렸다. 고마움을 흘려버리지 않고 기억해주고 싶은 것이 또한 나의 당연히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