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입문이 열리자 20대로 보이는 총각이 들어와 빈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간발의 차로 자리를 놓친 나이 지긋해 보이는 남자분이 “ 요즘 젊은 이들은 위아래도 없고 어른도 몰라봐.”라며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돌발상황에 놀란 젊은이가 일어서서 자리를 비켜주자 어르신은 민망한지 “ 난 집에 가면 너 만한 자식이 있어.”라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말투로 봐서 약간 술에 취한 듯도 했지만 눈살이 찌푸려졌다. 취중진담이라고 젊은이 보기에 나이 든 나까지 낯 부끄러웠다. 나이 들면 저렇게 해도 되는 것으로 젊은이가 보고 배울까 은근히 걱정스러웠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새록새록 번져가는 5월의 신록을 보면서 기분 전환을 하고 있었다.
‘어른!’이라는 말이 뇌리에서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오래된 앨범 속 빛바랜 사진처럼 떠오르는 얼굴이 어른이라는 말을 스치며 가슴을 두드렸다.
어느덧 40년 전이다. 초등교사로 초임 발령을 받았을 때였다.
3월이지만 아직 싸늘한 바람에 눈발까지 분분해서 햇병아리 교사인 나를 더 떨게 하는 지경이었다. 개학 첫날이라 아이들은 일찍 하교를 하고 동학년 교사들이 모였다. 온통 나이 지긋해 보이는 어른들뿐이었다. 20대 초반인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50이 넘은 부모님 뻘이었다. 잔심부름시키기에도 부담이 없는 나이 차이였다.
7명 중에 그나마 엄마뻘의 여자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
“ 강 선생이 우리 아들과 동갑이네” 하시며 내 등을 쓸어내리고 토닥토닥해 주셨다. 그날부터 그 선생님은 나의 ‘엄마선생님’이 되었다. 퇴근할 때도 꼭 우리 교실에 오셔서 나를 챙겨서 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가는 길동무가 되어 주셨다. 가는 길에 하루에 있었던 일도 이야기하고 신출내기에게 여러 가지 지도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때로는 과하게 시키는 업무에 제동을 걸며 나의 바람막이가 되어주기도 했다.
어느 날 동학년 모임에서 학년 대표로 공개 수업할 사람을 선정하게 되었다.
평생을 해도 교사에게 가장 부담스러운 것인 공개수업이다. 그것만큼은 절대 떠맡고 싶어 하지 않는 십자가였다. (지금은 학부모 공개수업, 동학년 공개수업도 당연히 모두가 담당을 하지만 그때만 해도 한 학년에 한 사람만 대표수업을 했다.) 당연히 나이가 가장 어린 사람이 할 수 밖에서 없는 분위기였다. ‘당연히 나’라고 자타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의논할 것도 없이 나로 자동 지목이 되었고 거부할 수도 없었다. 아버지뻘 되는 남자 선생님들이 모두 나를 위한답시고 “ 강 선생 걱정 마, 초임에는 아무리 못해도 흉이 아니야, 이제 우리는 나이 들어서 못 해.” 라며 이해를 구했다. 연륜의 양면이었다.
그때 엄마선생님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이제 막 발령받아서 인사기록카드에 잉크도 마르지 않은 자식뻘 되는 강 선생한테 학년 대표수업을 맡기는 것은 대선배들로서 도리가 아닌 것 같다.”라면서 자신이 하겠노라고 하셨다. 한두 살 차이로 엄마선생님보다 더 젊은 선생님들도 계셨지만 아무도 하겠노라는 남자 선생님은 없었다. 다들 뻘쭘해하면서 말렸지만 선생님은 대선배로서 이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하셨다. 선생님의 결연한 모습에 모두들 묵묵부답이었다.
당시로서는 그것이 얼마나 큰 양보인 줄 미처 모를 정도로 나는 사회 초년생이고 무지했다. 물론 진심으로 고마워했지만 오히려 경험이 많고 잘하는 사람이 대표로 수업하는 것이 더 합당한 결정이라고도 생각했다. 학교 전체에서도 가장 막내였던 나는 맡은 업무도 많고 업무 외에도 주어지는 일을 거부할 수 없는 입장이어서 늘 일에 파묻혀 지낸 것도 사실이었다. 오며 가며 말로 격려는 해도 직접 나서서 일을 대신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대상이기도 하고 모두 자신의 일만으로도 바쁜 생활이니 할 수 없었다.
엄마 선생님도 나이가 들면서 공개수업은 계속 면제가 되어서 자신도 손을 놓은 지가 10년이 넘은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내 앞에서 생색을 내거나 힘들다고 푸념을 하는 일이 없었다. 5월 어느 날 선생님의 공개수업은 수업뿐만 아니라 대선배로서 보여준 모범에 모든 동료 교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감탄 속에 박수갈채를 받는 성공적인 수업이었다. 50이 넘은 연세에 모든 교사들을 초청해서 공개수업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인 줄은 나도 경력이 쌓이면서 절감하게 되었다.
술김인지는 몰라도 자식뻘이니 자리를 양보하라고 야단을 치던 지하철 아저씨와
자기 아들과 동갑이라고 나를 자식처럼 아끼고 돌봐 주시던 대선배 엄마선생님이 대비가 되어 진정한 어른의 모습을 생각하게 했다.
사람이 나이 든다고 다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이가 벼슬인 시대는 진작에 사라지고 있다. 요즘 들어서 나도 툭하면 튀어나오려는 ’ 라떼(나 때는 말이야)’를 짓누르곤 한다. 진정한 어른까지는 못 되어도 꼰대라도 되지 않도록 늘 자신을 돌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