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읽던 책을 내려놓고 잠시 산책을 했다. 잘 가꾸어진 정원을 거닐다 꽃밭 앞에서 발길이 멈추었다. 마음의 여유 때문이었을까? 꽃 한 송이 한 송이, 꽃잎 한 장 한 장, 참 새뜻하고 예뻤다.
저마다 다른 모양과 색깔로 피어서 자기 이름표를 붙이고 있는 꽃들이 어느새 아이들로 보였다. 꽃밭은 마치 교실 같았다. 추억 속의 아이들이 꽃처럼 활짝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현직에 있을 때에 아이들을 꽃처럼 생각할 수 있었더라면 더 아름다운 교직생활이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스며들었다. 그날 나는 책 보다 이 꽃, 저 꽃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더 많이 들었다. 그 후 도서관을 갈 때마다 꽃밭을 들리는 소소한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지난가을, 다시 꽃밭을 가보듯이 퇴직한 초등학교에 음악전담 기간제 교사로 출근을 하게 되었다. 꽃들이 들려주던 이야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일단, 아이들을 꽃처럼 생각하기로 했다.
모르는 꽃 이름을 백과사전에서 찾듯, 아이들과 대면하기 전에 아이들 명부를 보고 좌석표를 만들었다. 교실이라는 꽃밭에, 꽃 이름 팻말 세우듯 책상마다 좌석 번호를 붙이고 그 번호대로 이름을 쓴 좌석표를 나의 책상에 붙였다. 아이들을 만난 첫 시간. 칭찬할 때도, 장난쳐서 지적을 할 때도 이름을 몰라서 “야! 너!”라고 부르지 않고 재빨리 좌석표를 보고 이름을 불렀다. 당연히 자기를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던 아이들은 갑자기 부르는 자기 이름에 흠칫 놀라면서 선생님이 자기를 알고 있었다는 것에 자존감, 친근감을 느끼며 체면을 세우는 것 같았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이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관계를 맺게 해주는 첫 단추였다.
꽃이 말해주었다. 꽃이 피고, 열매가 익을 때까지는 기다림이 있어야 한다고. 반드시 기다림의 과정을 건너뛰지 말자고 다짐했다. 리코더 연주를 하는데 따라오지 못하는 아이들 때문에 소리가 매끄럽지 못할 때도 속으로 생각했다. ‘저 꽃은 좀 더디 피는 꽃인가 보다…….’
때로는 “선생님, 얘는 리코더 안 하고 있어요.”라고 고자질을 하면 나는 “아니야, 그 친구는 지금 감상중이야.” 하면서 감상도 음악의 한 부분이라고 하면서 잠시라도 기다려 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되었다. 적어도, 떠들지 않고 듣고 있다면 그 아이는 꽃이 소리 없이 물을 먹듯 소리 없이 감상을 통해 음정 감, 박자감을 익히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음 단계로 그런 아이들에게 리코더 안 가져왔으니 우드 불럭(리듬 막대)으로 노래에 맞춰 리듬을 쳐보라고 했다. 그러면 그 아이들은 감상하면서 체득한 곡의 분위기를 살려서 리코더 연주에 맞게 리듬을 살려 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기다림의 시간 덕분에 연주는 꽃을 피운다. 리듬을 치는 아이들도, 리코더를 연주하는 아이들도 어우러져서 즐거운 음악이 연주되는 꽃밭을 만들어가곤 했다.
꽃이 말해주었다. 꽃은 저마다 모양과 향기가 다르다고. 6학년이어서 대부분 아이들이 변성기다. 고음이 자신이 없어서 노래 부르기 부담스러워한다. 마지못해 기어들어가는 작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아이들에게 “너는 목소리가 안개꽃처럼 잔잔하기 때문에 네가 있어야 꽃다발을 만들 수 있어.”라고 다독여 주었다.
목소리가 크고 고음도 잘 올라가는 아이들에게는 “너는 목소리가 모닝글로리구나, 나팔꽃처럼 잘도 올라가네.” 라며 줄기를 올려 주었다. 갈수록 자신도 모르게 더 자신감 있게 노래 부르는 모습이 마치 꽃이 자라는 것 같았다.
가끔 음악시간에 배운 노래를 한두 소절이라도 목청껏 부르며 복도를 지나가는 아이들이 있다. 소음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배어 나오면서 “바로 저거다!”라며 흐뭇해졌다. 음악에 대한 전문가는 아니지만 자신도 모르게 체득되어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이 진정한 음악의 즐거움이 아닐까 싶었다. 즐거워서 노래가 나오고, 연주가 되는 것이기에 음악이 아닐까. 짧은 기간이지만 아이들과 서로 얼굴을 붉히고 마음 상하는 일없이 즐거울 수 있었던 것은 꽃이 해준 말 덕분이었다. ‘아이들은 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