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가르쳐준 사람

~ 길을 가르쳐준 천사 ~

by 강신옥

차가운 겨울비가 내리는 날이면 문득 마음이 따뜻해질 때가 있다. 나이가 들수록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오롯이 떠오르는 기억 때문이다. 40여 년 전 중3 때였다. 오전으로 수업이 끝난 토요일이었지만 그날은 하교가 늦었다. 곧 있을 학년말 시험공부한다고 교실에 남았던 것이다.


아침에 엄마가 챙겨준 우산은 있지만 춥고 배고파서 비오기 전에 집에 도착하려고 발걸음을 재촉할 때였다. 어떤 아저씨가 교육청이 어디냐고 길을 물었다. 설명하기엔 먼 길이고 애매했다. 춥기도 하고 내 갈 길도 바빠서 일단 가다가 갈림길에서 설명을 해드린다고 했다.


중년으로 보이는 그 아저씨는 나를 따라오면서 사정을 설명하셨다. 강릉에서 오전 근무를 하고 오후에 안동으로 출장을 온 것이었다. 컴퓨터나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동료가 그려준 약도만 가지고 왔는데 길을 잘못 든 것 같았다. 아저씨가 이것저것 질문도 하고 이야기를 해서 어색한 분위기가 조금씩 따뜻해져 갔다. 교복 입은 나를 보고 학교 이름과 학년을 물어보기도 했다. 아저씨에게도 나와 동갑인 중3 딸이 있다며 반색을 하셨다. 아저씨는 자신을 구체적으로 소개하지는 않았지만 선량한 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저씨에겐 우산이 없어 함께 우산을 쓰고 갈림길까지 왔다. 교육청 가는 길을 설명은 했는데 차마 비를 맞고 가게 할 수가 없었다. 아저씨는 몇 번이고 사양했지만 나는 어차피 집에 가면 낮잠을 잘 것이라고 하면서 아저씨를 교육청까지 우산을 씌워 안내를 해주었다.

아저씨는 실내로 들어가시고 나는 처음 와본 교육청에 대한 호기심에 현관에서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환경 정리된 사진들도 둘러보며 머뭇거리는 사이에 금방 아저씨가 나왔다. 담당자가 퇴근을 해버려서 서류만 제출하고 나왔다고 했다. 기차역으로 가서 강릉으로 가신다고 하셨다. 다행히 기차역은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여전히 비가 오고 있어서 우산을 씌워드려야 했다. 기차역에서 헤어질 때, 교복에 부착된 명찰을 보고 내 이름을 부르며 아저씨는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겨울 해가 짧고 비까지 와서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시험공부 못한 불안함, 낮잠을 못 잔 아쉬움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지만, 고마워하던 아저씨의 모습이 나를 다독여 주었다.

길을 묻고 가르쳐주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기에 평범한 일상으로 곧 잊어졌다. 시험도 끝나고 겨울방학을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아침 조회에 들어오신 담임선생님이 환하게 웃으며 제 이름을 불렀다. 최근에 누구에게 길을 가르쳐준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선생님이 아예 신나서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나에게 길을 안내받은 아저씨가 교장선생님 앞으로 감사의 편지를 보내신 것이었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씌워주며 끝까지 길을 안내해준 학생이 너무 고마웠다고. 그날 기차를 기다리며 수첩에 우리 학교 이름과 나의 이름을 메모하셨다는 것이다. 교장선생님께 나를 칭찬해 달라고 부탁도 하신 것이었다.


너무 뜻밖이었다. 놀라움과 감동으로 심장이 쿵쾅거렸다. 수업에 들어오시는 선생님들, 친구들의 칭찬이 온종일 나를 쑥스럽게 했다. 며칠 후 교장선생님이 아침 조회 시간에 방송으로 또 사연을 소개하고 칭찬을 하셨다. 뿐만 아니었다. 국민교육헌장 선포 기념일에 선행 상을 주셨다. 부상으로 내가 갖고 싶었던 영어사전도 받았다. 날아갈 듯 좋아했지만 철없던 시절이라 그 의미는 미처 다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고마우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생각했다.


늘 그 일을 추억하며 살 줄 알았는데, 녹록하지 않은 삶의 모서리들에 부딪히고 닳으며 그 일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결국 세월 속에 스르르 가라앉았다. 얼굴조차 가물가물할 정도로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이제 인생의 후반전 나이다. 언젠가부터 아저씨에 대한 감동의 여진이 내 마음속에서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고 세상을 살아올수록 그 일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서운한 것은 잠을 못 잘 정도로 곰곰이 생각하지만, 고마운 것은 급할 때뿐 돌아서면 잊어버리기 십상이었다. 작은 고마움도 흘려보내지 않고 다시 헤아려본 아저씨가 어떤 일과 겹쳐 문득문득 떠오르곤 했다. 아저씨의 삶이 배어있는 그 일이 다시 내 가슴에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고마움을 되새기는 일은 삶의 묘약이었다. 아저씨만큼 보답하지 못한다 해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도 ‘꽁’했던 마음이 풀리기도 했다. 불평과 원망으로 우글거리던 마음이 잠잠해지는 것도, 내 삶이 온기로 되살아나는 것도 고마움을 되새길 때였다.


그날, 내가 그 아저씨에게 길을 가르쳐준 줄 알았는데 살아갈수록 그 아저씨야말로 나에게 삶의 길을 가르쳐준 사람이었다. 작은 고마움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되새기며 아저씨가 가르쳐준 길을 멈추지 않고 걷고 싶다.

어딘가에 계실 아저씨의 인기척이 느껴진다. 한파주의보가 내렸다는데 세상이 왜 이리 따뜻할까…….


-2018 월간 <좋은생각> 생활문예대상 입선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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