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을 앞둔 어느 날의 일기

~ 그냥 현재 진행형의 삶에 감사하며 ~

by 강신옥

(퇴직하기 1년 전에 쓴 글입니다 )


쉼 없이 흐르는 세월이구나.

1 년 후가 내 삶에서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고 있다.


1년 후, 가장 큰 변화라면 역시 직장 일선에서 물러난다는 것이다. 아쉬움도 있겠지만 삶의 짐을 하나씩 내려놓는 것의 시작이니 솔직히 가벼워지는 느낌도 든다. 나이 든다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이 아닌가 보다.

남보다 극적인 삶을 산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주어진 삶을, 숙제하듯 헉헉대며 살아왔다.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지만 젊은 시절을 다 보내고 퇴직을 하고 돌아보면. 참 감개무량할 것 같다.


퇴직이란 현직에서 물러나는 것이지 삶에서 물러나는 것은 아니다. 프리를 선언하는 것이니 삶에 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퇴직이란 자유를 누리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자격을 얻은 것 아닌가.

자유! 말만 들어도 설렌다. 내가 주체가 되어 시간을 쓸 수 있다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 생각만 해도 벌써 날아갈 듯 가벼워지는 기분이다. 비로소 내가 주인공이 되는 삶이 시작되는 것이 퇴직이라 생각하니 퇴직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일 뿐이다.


얽매임과 모든 경쟁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삶에서 벗어나 있겠지? 진짜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는 여유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읽고 싶은 책을 찾아 읽으러 도서관에 간다는 것. 생각만 해도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책이라는 그늘에서 세상살이에 쫓기며 흘렸던 땀을 식히고 팍팍해진 마음에 물을 주고 싶다.

어쩔 수 없이 겉은 늙어가도 속이 녹슬지 않는다면 나이 들어가는 것, 담담히 받아들이고 싶다. 나쁘지만은 않다.


직장 생활하랴, 살림하랴, 바쁘다고 세상을 참 대충 보고 살지 않았던가. 꼭 필요한 것만 보며 살기도 바쁜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휙휙 지나쳐 버린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더 나이 들기 전에 세상을 다시 구석구석 세심하게 봐 두고 싶다.


퇴직하면 하고 싶은 일이 참 많다.

우선 산책을 하는 생활을 하고 싶다. 종종걸음 치며 출퇴근하던 조급증에서 벗어나서 천천히 걷고 싶다. 느린 속도가 좋아서가 아니다. 자연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싶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볼 수 있는 여유, 가슴 설렌다. 사철 초록으로 밋밋해 보이지만 비바람을 견디며 늘 제자리에 서있는 나무, 한 달도 채 피어있지 못하고 지는 화려한 꽃들, 그들의 이야기는 천천히 걸어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쇼윈도에 진열된 옷이 아니라 자연을 보고 들으며 계절이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길 바란다.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꽃과 나무들의 이름도 불러보고 싶다. 꽃을 피운 이야기, 나무가 살아온 이야기를 ‘찰칵’ 카메라에라도 기록해두고 져버린 꽃과 나무를 기억해주고 싶다.


어디 자연뿐일까!

정직하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땀과 눈물이 설교이고 감동일 것이다. 그들과 삶을 이야기하고 맞장구치며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다면 사는 맛이 날 것 같다. 진실은 여러 개가 아니기에 우리는 진정한 삶을 살아갈 용기를 낼 수 있는 것 아닐까. 진실은 가라앉지 않기에 글로라도 쓸 수 있는 것 아닐까!


퇴직 후, 비켜갈 수 없는 것이 할머니일 것이다.

이왕이면 ‘좋은 할머니’가 되길 응원한다.

시부모님을 비롯해서 주위의 도움이 있었기에 30여 년의 직장 생활이 가능했다는 것 부인할 수 없다. 아쉬울 때, 다급할 때 전화하면 한밤중, 꼭두새벽에도 달려와 준 시부모님. 그들이 있었기에 마음 놓고 출근할 수 있었고, 퇴근 후 갑작스러운 회식도 감당할 수 있었다. 아이들을 키울 때는 여름, 겨울방학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방학이 끝나갈 때마다 아이들 돌봐줄 사람 문제로 얼마나 고심하며 갈등했는가?

이제 퇴직을 하면 언제가 119 요원처럼 어디든 언제든지 기꺼이 달려가는 할머니가 되지 않을까. 올챙이 시절을 잊어버리는 개구리가 되지는 않아야 할 텐데…….


‘말이 씨가 된다.’고 퇴직 후, 이 글이 좋은 열매로 거둘 수 있기를 꿈꾼다.


지금 퇴직을 했고 나이만 정직하게 더 많아졌다.

나이 먹는다고 다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시간의 밀도가 달라졌을 뿐 나만을 위해 시간을 통째로 쓰며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늘 그냥 현재 진행형으로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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