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해서가 아니고 소중해서

~ 들어줘서 살 힘이 났습니다 ~

by 강신옥

93세 친정엄마는 자연인도 아니면서 시골에 혼자 산다.

대상포진 후유증으로 약을 복용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티면서도 아직은 자식들한테도, 요양원 신세도 지기 싫어한다.

하루 종일 혼자 몇 번이고 예배드리고 살림하느라 쉴 새 없이 활동을 하지만 사람 소리가 그리울 때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TV가 효자이다. 재미가 있든 없든 적적할 때는 언제든지 사람 목소리 들을 수 있는 TV라도 곁에 있어서 다행이다.

엄마의 진짜 관심사인 저녁 일일드라마와 9시 주요 뉴스가 끝나면 엄마는 전화를 기다린다. 효녀도 아니면서 밤이면 전화를 기다릴 엄마가 눈에 밟혀서 통화를 자주 한다.

엄마랑 통화하면 거의 엄마 혼자 이야기를 하고 나는 주로 맞장구로 리액션만 해도 30분은 금방 훌쩍 넘긴다. 엄마의 이야기는 늘 비슷하다.

나도 다 아는 그날의 날씨, 운동 겸 산책한 이야기, 산책하다 만난 사람, 그 사람과 나눈 이야기, 하루 세끼 끼니 이야기, 일일드라마 이야기, 코로나 상황 등등 거의 엄마 하루 일상이다. 솔직히 나에게 필요한 정보나 관심사는 아니다. 때로는 전혀 관심도 없는 드라마 진행과정까지 듣고 있을 때도 있다. 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듣기도 한다.



듣고 있자면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겨우 이런 이야기 들으려고 전화를 해야 하는가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 그래도 그런 이야기 들으려고 귀한 시간 내서 전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고 만다. 그 날 선 충고가 얼마나 큰 상처인 줄 알기 때문이다.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말로 들리고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일인 줄 알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이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도 사실 현실적으로 얼마나 대단한 도움을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리라는 기대감과 믿음 때문에 이야기를 한다. 나는 엄마의 기대와 믿음을 져버리지 않으려고 나에게는 별 것이 아니지만 그저 열심히 들어준다.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마는 소통이 되는가 보다. 마음에 고여 차오른 이야기들을 퍼내어도 삶의 무게는 그대로이지만, 아픈 것이라도 잠시 잊고, 마음이라도 가벼워져서인지 통화하면서 엄마의 목소리가 커지고 밝아질 때가 많다. 전화 통화하고 잠을 잘 잤다는 이야기도 한다.


언젠가 TV 채널을 넘기다 채널을 고정하고 말았다.

“ 제 얘기를 들어줘서 살 힘이 났습니다.”라는 어느 청년의 고백이었다.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의 고백이 아닐까. 가슴을 두드리는 울림에 화면 속으로 주인공을 따라가 봤다.

주인공인 청년이 살아온 세월은 프로그램 이름처럼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술만 먹으면 가정폭력을 일삼는 아버지, 폭력에 견디지 못해 가출한 엄마, 항상 배고픔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했다. 먹고 싶은 것 먹을 수 있고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곳이라 믿고 두 말없이 가방을 챙겨서 입소했던 보육시설에서도 남모르는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어쩌다 만난 위탁가정에서의 평안하고 행복한 생활도 잠시였다.


아버지가 개과천선을 한 줄 알고 온 가족이 다시 모여 살게 되었지만 착각이었다. 보육원에서 받은 생활보조금까지 아버지의 술값으로 탕진을 하고 여전히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로 엄마는 다시 가출을 했다. 주인공도 고등학생이 되어 가출을 해서 친구 집에서 지냈다. 신문배달, 우유배달 등 온갖 아르바이트 연속인 생활이었다. 친구들은 대학 진학을 위해 불철주야 학업에 정진할 때 주인공에게 학교는 잠을 자는 유일한 곳이었다.


끝없는 고생길,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삶에 지쳐갔다. 차라리 죽는 것이 편할 것 같았다.


자살을 준비했다.

가족이 있어도 혼자라는 생각에 죽음을 각오했다.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친구의 신고로 경찰이 문을 따고 들어왔다. 자살을 시도하려는 주인공에게 경찰이 한 일은 설득이나 만류가 아니었다. 주인공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었다. 도중에 끊지도 않고 재촉도 하지 않고 그저 듣고 또 들어주었다.


주인공은 다른 세상을 만난 듯 놀랐다고 했다. 부모도 형제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려는 사람은 없었다. 살아오면서 자기 이야기를 이렇게 귀를 기울여 열심히 들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세상에 대한 시선이 달라졌다. 몸 담고 살아온 세상에 온기가 느껴졌다. 세상에 대한 원망과 억울함에 죽기를 각오한 무장이 해제되어 단단한 마음이 점점 풀어지고 열리고 있었다.


세상에 자기의 사정을 이해하려는 사람이 있고, 자신을 소중하게 인정하는 사람이 있다는 믿음이 삶에 대한 희망의 싹을 틔워주었다.

자기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준 한 사람으로 인해 자살하려던 마음을 멀리 던져버렸다. 든든한 버팀목이 생겼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경찰과는 형 동생으로 지내고 있었다. 영상통화로 경찰관의 얼굴을 보고 한 번 더 놀랐다. 형 동생으로 지내기엔 너무나 나이가 지긋해 보였다. 아버지뻘이었다. 거리감을 없애고 부담 없이 이야기할 수 있도록 형이라 부르게 했다니 속 깊은 정에 한 번 더 감동했다.



사람은 누구나 참 약하다.

말 한마디에 삶과 죽음이 바뀌기도 한다. 죽음에서 삶으로 마음을 바꿔주는 것은 꼭 그리 위대한 것이 아니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진심으로 들어주는 것!’ 그것이 그렇게 위대한 힘이 될 수 있었다. 그 힘이 자존감이 되고, 믿음이 되어 주었다. 믿음만큼 큰 힘이 되어 주는 것이 또 있을까.


주인공의 울분을 화풀이로 치부해버렸다면, 결손 가정 자녀의 하소연으로 값싼 동정이나 쥐어주고 말았다면, 그런 이야기나 들을 정도로 한가한 사람 아니라고 피하고 말았다면, 보아하니 살아가면서 덕 볼 일 없는 사람이라고 무시했다면 ,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듣는 척만 하고 돌아서서는 시간 아깝다 불평이나 했다면…….

마음을 바꾸어 다시 세상을 더 살고 싶었을까!


세계 10위 안에 드는 선진국 대열에 있는 우리나라이다. 굶주리는 사람도 없고 복지 수준도 높은데 왜 자살률 세계 선두를 차지하고 있을까! 가슴 아픈 일이다.

"빨리빨리"문화에 젖어서 우리 서로 잘 들어주지 못해서인지도 모른다.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어서 죽음을 택하는 시대가 아니다.

공기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는 식물도 시들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을 보면 사람은 오죽할까 싶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칭찬까지는 아니라도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것은 최소한 들어주기라도 하는 공감일 것이다. 소통이 되지 않을 때의 답답함, 공감 에너지의 방전이 우리 삶을 멈추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TV 주인공처럼 아이러니하게도 가족들로 인해 죽음을 결심했다가 낯 모르는 사람에 의해 다시 삶을 선택하는 일도 허다하다. 사실을 안다고 해서, 가까운 사이라고 해서 다 공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공감이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일이기에 그 진정성이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있고, 삶의 에너지가 되어주는가 보다.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오늘 밤도 나는 엄마의 일상을 전화로 들었다.

양배추 쌈이 참 달고 맛있었다는 이야기, 중단했던 약을 다시 복용한 이야기, 다리가 아파도 동네 한 바퀴 돌았다는 이야기 등등 매일 듣는 이야기지만 엄마에겐 중요한 이야기였다.



한가해서가 아니라 소중한 사람이어서 듣고 있었다. 환자이어서 참고 들어주었다. 맞지 않는 사실도 노인이어서 맞추어 주었다. 엄마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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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책길에 만난 까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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