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그 자리에 있지 않아서 다행

~ 딱 그 자리에 가봐야 아는 일 ~

by 강신옥

최근 핫뉴스의 핵심은 역시 돈이었다.

한국 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신도시 땅 투기 사태에 국민들의 분노가 커지고 있다. 뉴스를 처음 접할 때 나도 ‘생선가게를 고양이에게 맡긴 격’이라고 허탈했고 기가 막혔다. 농담이었다고 둘러대기는 하지만 “ 잘려도 평생 월급보다 더 벌어”라는 LH 직원의 말 한마디도 불난 민심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었다.


연일 떠오르는 투기 의혹에 함께 속았다는 공분을 금치 못하던 나였지만 언젠가부터 입을 다물었다. 쉽게 끓고 쉽게 식는 한국인의 냄비 근성 때문이 아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어서도 아니다. 투기 한 사람들 중에 목숨을 끊는 사람에 대한 동정심도 아니다. 문득, 기억의 저편에 깊이 묻혀 있던 작은 기억의 조각에 찔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투기를 한 사람들을 향해 던지려던 돌을 차마 던지지 못하고 내려놓았다.


1980년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나라가 아직 선진국 대열에 들지도 못해서인지 부정부패도 심했던 시절이었다.


결혼을 해서 남편이 있는 서울로 전근이 되었다. 주말부부의 불편이 해결되어서 너무 좋아했다. 직장동료들의 축하와 부러움을 한껏 받으며 입성한 서울이었지만 막상 와서 보니 집이 문제였다. 지방과 비교할 수 없는 세계적인 서울 집값에 정말 입이 딱 벌어질 정도였다.


중개인 소개로 집을 보러 다니면서 반지하에도 사람이 사는 것을 보고 신기해했다. 반지하에 사는 사람은 엄청 빈곤층인 줄 알았다. 그런데 우리 가진 돈에 맞춰보니 전세를 얻으려면 지상으로는 올라올 수가 없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광명에 작은 아파트 전세를 얻었다. 처음엔 어떻게 경기도에서 서울로 매일 출퇴근을 할 수 있는지 납득이 안 되었지만 우리에겐 그것도 감지덕지였다.


서울의 시내버스가 광명까지 다니고 전화 지역번호도 서울과 같이 02를 쓴다는 부동산 중개사님의 달변 선전에 우리는 그저 할 말을 잃고 고개만 끄덕였다. 집을 보러 갈 때는 출퇴근 시간이 아니었기에 지하철로 일단 개봉역까지 가는 것도 다행이라 여겼다.


막상 집을 얻어서 매일 아침저녁 출퇴근을 하면서 지하철 출근은 포기를 했다. 그야말로 지옥철이었다. 인천에서부터 이미 꽉 차서 출발하는 정도이니 내가 승차하는 개봉역에 오면 두 눈 뻔이 뜨고도 차를 타지 못할 때도 많았다. 동료 선생님은 졸업식이라고 한복을 입고 지하철을 탔다가 한복이 다 구겨지고 머리는 수세미처럼 되어서 출근을 한 모습에 우리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했다.


서울에 집이 있는 사람이 부럽기 그지없을 때였다.

친밀하게 지내던 지인으로부터 솔깃한 제의를 받았다. 그것도 나를 위한 배려였다. 지인의 남편이 직장에서 아파트 건축을 앞두고 조합장을 맡게 되었는데 말만 하면 분양권을 얻게 해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부동산을 사든 팔든 그것은 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일이지 정부의 손이 미치지 못할 때였다.


소위 돈이 돈을 버는 시대였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아파트를 사서 프리미엄을 얹어서 되파는 식으로 이익을 챙기던 시대였다. 집을 살 돈이 없으니 부동산에 대한 법도 전혀 모르던 나였다. 나를 챙겨준 지인이 고맙기 그지없었지만 일단 대출을 받아서 분양권을 사는 것도 우리 부부의 배짱으로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사정을 들은 지인은 답답해하면서 차선책으로 내가 무주택자이니 명의만 빌려줘도 상당한 돈을 벌 수 있다고 했다. 허락만 하면 조합장 남편이 얼마든지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언질을 주며 권했다. 바로 그것이었다. 정말 달콤한 유혹이었다. 무주택자이니 우리 부부가 얼마든지 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설령 아파트 분양은 받지 못해도 내 집 마련을 위한 자산을 확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벌써 아파트라도 마련한 것처럼 가슴이 설렜다.

집에 와서 남편이 퇴근하고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지루해서 괜히 집안을 서성거리고 창밖을 수도 없이 내다보며 남편을 기다렸다. 하나님이 주신 기적이라고까지 믿어졌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라 연락을 해볼 수도 없고 남편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날도 남편은 지옥철에, 만원 버스에 시달리며 파김치가 되어 퇴근을 했다.


저녁을 준비하느라 몸은 주방을 서성이면서도 음식을 하는 둥 마는 둥 마음은 온통 콩밭에 가 있었다. 내 이야기의 자초지종을 들으며 남편도 눈이 빛나며 흥분이 될 정도였다. 은행 통장에 벌써 잔고가 고층 아파트를 향해 쌓이고 있는 듯했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들어오니 남편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남편을 잘 아는 나는 남편 마음이 변할까 봐 불안했다. 집이니 돈이니 프리미엄이니 온종일 흥분했던 일을 정리하고 잠자리에 누웠는데 이상한 적막감이 흘렀다.


“내일 출근해서 답을 줘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긴 침묵을 깨고 물었다.

남편이 한숨을 푹 쉬면서 입을 열었다.

“ 아닌 것 같아, 명의를 함부로 빌려주는 것이 아닌 것 같아, 무슨 일 있으면 책임 질 각오까지 해야 하는데 좀 불안하네” 그 말을 들으니 세상 물정 모르는 나도 갑자기 방안의 어둠만큼이나 불안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잠을 설치고 아침에 일어나 기도하고 출근하면서 우리는 그 일을 포기하기로 뜻을 모았다. 만원 버스에 시달리면서도 평소와 달리, 마음이 편하고 가벼워서인지 흔들림도 즐길 수 있었다. 마음만 받고 없었던 일로 마무리를 지었다.

세월 속에 가라앉아버렸던 일이다. 그런데 이번에 LH 직원들의 투기 사건을 보면서 '광명시'이라는 동일지역 때문인지 문득 그때의 내모습이 떠올랐다. 절호의 찬스라고 설레었던 나, 특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라고 들떴던 내가 그들과 겹쳐졌다.


돌팔매질 댓글을 받을지 모르지만 ‘나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어떻게 해서든 합류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나는 절대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것은 사람의 본성을 어느 정도 깨달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똑같은 처지에 있지 않으면서 남의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가 가르쳐준 조심성 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잘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투기자들 중에 지인이나 친척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그 자리에 있지 않아서 그런 일을 하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기회에 흔들렸던 자신을 떠올리며 이제 그들에 대한 조사와 응당한 처분은 정부에 맡길 뿐이다.


우리집은 서울에서 이름만 대면 부의 상징인 동네도 아니고 명품 아파트도 아니다.

오래되고 낡았지만 햇빛 잘 들고 교통 편리하고 경비 아저씨들 친절한 지금의 우리 아파트로 만족한다.


집이란 그저 자기가 사는 곳 한 채이면 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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