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 판매점 세상을 꿈꾸며

~ 믿음과 자유가 있는 곳 ~

by 강신옥

“또 가게 주인이 바뀌나 보다.”

아파트 상가를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오며 가며 한 마디씩 던지고 지나갔다. 안쓰러운 마음도 컸다. 아파트 상가 후미진 곳에 있는 작고 초라한 가게는 주인이 자주 바뀌었다.

작지만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는 슈퍼마켓이었다.

요리를 하다가 갑자기 양념이 떨어지거나, 건전지 수명이 다 했거나, 늦은 밤 허기가 져서 간식이 필요할 때, 등등 비상시 요긴한 곳이었다.

하지만 몇 분만 더 걸어가면 대형 할인마트가 몇 개나 있으니 아파트 단지 내 작은 슈퍼가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나이 지긋한 슈퍼 사장님 부부는 그 작은 가게에 최대한 물건을 다양하게 구비해 놓으려 애를 쓰시는 것 같았다. 어쩌다 들려보면 사람이 겨우 한 사람 다닐 정도의 통로여서 물건이라도 넘어뜨릴까 봐 조심스러웠다.

협찬하는 곳에 따라 간판도 여러 번 바꾸어봤지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는지 어느 날 ‘점포정리’ 안내가 붙었다. 물건을 대폭 할인하며 울며 겨자 먹기로 정리를 했다. 사장님이 덤으로 과자도 주시며 그간의 고마움의 정을 표시하셨다.

우리 입장에서는 아쉬웠다. 그래도 없어지는 것보다는 급할 때나 비상시를 대비해서는 있는 것이 편리했는데, 가게 사장님은 임대료와 세금도 감당하기 힘들었나 보다. 오며 가며 빈 가게를 볼 때마다 허전하고 무슨 가게가 들어올지 기대가 되면서도 위치상 걱정도 되었다.


얼마 가지 않아서 과일 채소만 파는 가게가 들어왔다.

배달전문 가게라고 했다. 믿고 먹을 수 있는 신선한 채소 과일을 즉시에 배달해 준다는 광고가 붙었다. 왠지 불안이 스쳤다. 근처 대형 할인마트, 24시간 배달 전문 할인마트와 경쟁에서 견딜 수 있을지…….

30대로 보이는 젊은 부부가 제법 열정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했다.

워낙 좁은 매장이라 가끔이지만 들어가면 눈치가 보여서라도 그냥 나올 수는 없었다. 대파 한 단이라도 무 하나라도 사서 나오기는 했지만 대형 마트에 비해서 물건의 가짓수가 적고 다양하지 않았다.


가게 오픈한 지 한 두 주가 지나면서 벌써 파장 분위기가 감돌았다.

남들보다 늦게 문을 열고 일찍 문을 닫고 휴일은 아예 문도 열지 않았다. 오는 손님이 없으니 문을 열고 지키고 있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는지도 모른다. 오래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서너 달을 버티다가 또 빈 가게가 되었다. 가게는 이제 뭘 해도 잘 되지 않을 위치라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번엔 가게 대형 유리에 아이스크림 가게가 들어올 것이라며 깃발을 휘날리듯 ‘Coming Soon~'이 붙었다.


사람들은 또 투덜거렸다.

갈수록 태산이다. 또 무슨 아이스크림이야, 길만 건너면 이름난 B**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는데, 또 어떻게 경쟁하려고, 등등 하기 쉬운 것이 남의 말이니 아무 말 대잔치를 했다. 아파트 사람들은 가게가 오픈하기도 전부터 문 닫을 걱정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오픈 전 날, 밤늦게까지 환하게 불을 밝히면서 인테리어를 하는 모습부터 오픈을 하고 있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클 것이라고 더 걱정이 되었다. 가게는 작은 규모답게 귀엽고 깜찍한 분위기로 탈바꿈을 했다.


핑크빛 귀염둥이 이모티콘들이 움직이는 유리창, 환한 불빛의 실내, 24시간 활짝 열어진 출입문, 무엇보다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바로 무인 판매점이었다.

좁은 공간에 항상 주인을 가까이에서 의식해야 했던 분위기를 완전 탈바꿈한 것이 바로 무인 판매였다. 아이스크림과 과자만으로 품목이 단순해져서 공간적으로 넓어지기도 했지만 지키는 사람이 없어졌다는 것이 획기적이었다.

아무도 없는 가게에 24시간 활짝 열린 출입문만 봐도 들어가 보고 싶어 졌다.

눈치 볼 사람이 없으니 더 쉽게 쑤욱 빨려 들어가 듯 들어가게 된다. 늘 닫아져 있어 문을 밀고 들어가기 부담스러웠는데 24시간 활짝 열어진 문은 발길을 들여놓게 했다.


어른들도 재미 삼아 들어갔다가 하하호호 웃으며 손자들 줄 요량으로 몇 개라도 사서 나온다. 엄마 아빠 손을 이끌고 들어가는 아이들에겐 아주 놀이터가 되었다. 부모도 아이도 주인 눈치 보지 않고 고르는 자유를 누린다. 특히 젊은 청춘남녀들까지 자유스럽게 드나들고 있다. 왠지 재미로라도 자꾸 들어가고 싶어 진다.



좁지만 이상하게 자유스러워졌다.

좁은 가게가 자유라는 것으로 심리적으로 더 넓어졌다.

마음껏 구경을 하며 이것저것 마음 가는 대로 바구니에 담는다. 사든 말든, 많이 사든 적게 사든 눈치 볼 일이 없다. 들어가서 사지 않고 나와도 부담이 없어서 덜 미안하다.

자동화된 계산대에서 카드나 현금으로 스스로 계산을 한다.

어딘가에 CCTV가 있고 무슨 제동장치가 되어 있을 수도 있지만 일단 우리는 눈에 거치는 것이 없는 자유스러움을 만끽하며 쇼핑을 하고 양심껏 계산을 한다.


알록달록 과자가 진열된 환하게 밝아진 실내가 동화 나라 같다.

손님도 별로 없고 매출이 없어서 절약하느라 늘 어두웠던 실내였는데 아름다운 조명으로 밤에도 대낮처럼 환해졌다. 마치 마음 속까지 환하게 비추는 듯하다. 환한 조명이 동화 속 어린이들처럼 순수한 동심으로 돌아가길 밝혀주는 듯하다.



무인 판매점 가게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마다 그 순간이라도 내가 더 맑아져서 나오는 것 같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정직하게 사고 계산을 했다는 극히 당연한 일이 왠지 자존감을 세워준다. 마음도 맑아지고 어깨도 펴진다.

누군가 나를 믿고 맡겨 주었다는 것이 고맙고 순간일망정 내가 주인이 된 기분이다. 마음까지 달콤하고 시원한 아이스크림 맛이 배어서 나온다.

아이스크림과 과자 음료수만 살 수 있는 곳이어서 단순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들린다. 큰 욕심 낼 것이 없으니 부족함도 없다. 그저 잠시 머리도 식히고 마음도 즐거워지는 달콤하고 시원한 아이스크림 맛 그대로이다.

입소문이 가장 무섭다고 했던가. 초라하고 보잘것없어서 애물단지 같았던 곳이 어느새 아파트 내의 명물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옛날 추억 속에도‘무인 판매점’이 있었다.

여고 3학년 때였다. 학교에서 매점을 무인판매제로 바꾸었다. 학용품과 빵과 음료수 정도의 간단한 품목이어서 사람을 쓰면 인건비가 더 든다고 여고생의 순수함을 믿고 무인 판매점으로 하겠다고 했다. 그 옛날로서는 너무 참신한 마케팅이었다.


야간자습을 하다 보면 종종 판매된 물건과 수입이 맞지 않는다고 외상으로 물건을 가져간 학생은 외상을 갚으라는 학생주임 선생님의 방송이 나올 때가 있었다. 우리는 그 의미심장한 방송에 미소를 머금곤 했다. 때로는 외상을 갚아줘서 고맙다는 방송이 나오기도 했다.

외상 방송이 나오니 괜히 의심받을까 봐 매점에 가는 발길을 망설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1, 2학년이 소풍을 간 날이었다. 고 3만 출석을 한 날이었다. 야간 자습이 끝나가는 늦은 밤, 또 방송이 나왔다. 고 3만 출석한 오늘은 매점에 팔린 물건과 수입이 딱 맞았다고 했다. 그동안 야간자습을 하는 3학년이 의심을 받았는데 오늘로서 오해가 풀어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공부를 하다 말고 교실마다 박장대소가 터졌다.


자동 계산대도 CCTV도 없고 오로지 현금만이 통용되던 시대의 에피소드였다. 외상으로 빵을 먹은 사람이라며 둘러서 양심에 호소할 때마다 장발장이 생각나서 웃음을 짓곤 했다. 서로 마음에 상처 주지 않으려 유머로 호소하던 추억의 무인판매였다.


긴 겨울 침묵을 깨고 벚꽃이 만개하듯 폐업을 이어가던 가게가 무인 판매로 축제 분위기이다. 화사한 꽃이 떨어져도 연둣빛 잎이 나오고 초록으로 짙어지며 그늘을 드리우 듯 명물이 된 무인 판매점이 오래오래 우리들의 쉼터가 되어 주길 빌어본다.


물건을 사고팔면서 인정도 오가는 것이 사람 사는 맛이고 단순한 품목이어야 가능하겠지만 때로는 서로 믿고 맡기는 무인 판매점도 색다른 맛이 있었다. 홀가분하고 편안해서 좋았다. 누가 일일이 지키고 감시하지 않아도 양심이 자신을 지키는 무인 판매점이 정직한 자유를 누리게 했다.


대형마트에서 자동화로 실업자가 발생하는 차원을 달리하는 문제가 마음에 걸리지만, 개인이 운영하는 가게정도이면 서로 믿고 사는 작은 천국 분위기를 연출했다.


온 세상이 서로 믿고 사는 밝고 환한 무인 판매점 같은 세상이 되길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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