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책을 만나면 항상 하는 습관이 있다. 일단 거실 탁자에 놓아둔다. 책꽂이에 들어가면 나오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꽤 두툼한 책을 들고 넘겨보았다. 맛보기로 몇 장이라도 읽어보려던 심사였다. 정식으로 읽으려고 작정하고 시작한 것은 아닌데 자꾸 빠져들고 있었다.
어린 시절, 참새 방앗간처럼 드나들었던 우리 동네 구멍가게로 순간 이동해서 돌아가 있었다. 책 속의 구멍가게와 우리 동네 구멍가게를 혼동하며 책 속으로 점점 깊이 들어갔다. 친구의 엄마였던 주인아주머니가 방문 한쪽 조그만 유리 칸으로 내다보다가 지금 막 일어서서 나오고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소름이 돋았다.
박혜진, 심우장 작가가 우리의 일상 속에서 구멍가게가 있어온 모습, 구멍가게가 짊어져온 역할들을 되짚어보고자 직접 구멍가게 오십여 곳을 찾아가서 현장답사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각종 매체와 문헌자료를 검토하고 정리한 일종의 구멍가게 답사보고서였다.
구멍가게의 역할은 그저 돈을 받고 물건을 내어 주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삶의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마트와 편의점에는 없는, 우리의 추억과 마을의 이야기가 모여 있는 곳’인 지금은 사라진 우리 동네‘구멍가게’가 책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구멍가게 한쪽에 놓여 있던 낡은 평상에는 낮에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 수다를 떨며 나물을 다듬고, 저녁이면 아저씨들이 모여 과자나 오징어를 곁들며 술을 마셨다. 그러다 보면 마트에서는 할 수 없는 외상도 구멍가게에서는 가능했다. 구멍가게 주인은 동네 집집의 사정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공중전화 사용한다고 동전 바꾸어 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도 지금 생각하니 좀 미안한 일이다. 구멍가게에서 우표를 사면서 우표 붙일 풀도 서비스로 얻어 썼다. 동네 구멍가게가 우체국, 전화국, 카페 역할, 주막집, 만남의 장소까지 했다니 허름해 보여도 역할은 대단했다. 거기다 택배, 버스 터미널 역할까지도 감당했다니 정말 없어서는 안 될 곳이었다. 일상적이지만 풍부한 삶의 공간이었다.
구판장, 상회, 슈퍼, 마트, 편의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호의 이면에서 구멍가게의 과거와 현재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철없던 어린 시절 부모님이 구멍가게를 하는 친구가 참 부러웠다. 과자도 마음껏 먹을 수 있고 모든 물건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것으로 보였는데 책을 읽으면서 흩어져 있던 기억들의 퍼즐이 맞추어졌다. 1년 365일 쉬는 날이 하루도 없었던 이유도, 새벽처럼 문을 열고 밤늦게까지 불을 밝히고 있어야 했던 그들의 고단함을 그때는 그저 당연지사로 여겼다. 슈퍼마켓이 문을 열기 전, 슈퍼가 문을 닫은 후의 틈새시장을 놓치지 말아야 했다. 같은 반이었던 친구가 왜 공부시간에 졸 때가 많았는지 가슴이 아려왔다.
눈치 없이 친구 앞에서 슈퍼가 생겼다고 신기하다고 떠들어댔다.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물건을 선택적으로 골라 살 수 있다고 선전을 해댔다. 구멍가게에서 슈퍼로 발길을 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도 신바람까지 들썩이다니. 친구네 구멍가게는 얼마나 타격이 컸을지 이제야 내색도 할 수없었던 친구네 구멍가게가 아련히 떠오른다.
책 속에 구멍가게도 내가 살던 작은 동네 사거리 코너에 있었던 구멍가게와 너무 흡사한 곳이 많았다. 방 한 개 곁에 딸린 그 작은 공간에 물건을 겹겹이 진열해 놓고 파는 구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옹색한 가게에 엄마가 사 오라던 물건이나 양념이 어찌 다 갖추어져 있었는지, 또 주인아주머니는 말만 하면 그 많은 물건을 파헤치고 요구한 물건을 잘도 찾아 주었다. 아마 구멍가게 주인은 모든 물건의 품목, 가격, 물건이 있는 위치를 컴퓨터처럼 다 꿰고 있었나 보다.
백화점에서는 고가품, 슈퍼마켓이나 마트에서는 저가의 생필품을 구매하니 더는 버틸 수 없어 간판을 내리는 구멍가게들을 보며 작가는 아쉽고 착잡한 마음에 수명을 다한 폐가게 앞에 설 때면 시간의 묘비 앞에 선 듯 숙연해진다고 했다. 이심전심이었다.
우리 동네 구멍가게 안으로 들어가 듯 책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작가의 시선을 따라 나도 좀 더 밀착된 시선으로 구멍가게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인테리어와 익숙한 상품에 담겨 있는 생활문화사의 일면을 통해 구멍가게의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사서 먹고 썼던 히트상품들을 보니 구멍가게는 우리 생활문화사의 축소판이나 다름없었다.
책 속의 품목 사진들을 보며 그 옛날 먹고 쓰고 했던 일이 눈앞에 선했다.
하나 물고 십 리 가는 눈깔사탕, 뻥튀기와 꽈배기, 국민과자 크라운산도, 정(情)의 한류, 초코파이, 운동회와 소풍 갈 때나 맛보았던 칠성사이다, 비상식량의 대명사인 라면 등등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하나같이 추억을 떠올려주고 우리 생활 문화사의 단면을 보여주는 상품들이었다.
마지막 4부에서는 구멍가게를 배경으로 치열하게 울고 웃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나의 삶도 되짚어보았다.
“살아온 일을 생각하믄 참말로 아실아실해.”
화순의 어느 기찻길 옆에 자리한 조그마한 구멍가게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다. 살아온 인생을 한 마디로 압축시켜서 한 말씀일 것이다. 할머니의 허리가 구십 도로 굽어 있었다고 했다. 허리만큼이나 굴곡진 삶이었음을 직감하며 온 몸에 전율이 흘렀다.
‘구멍가게 이야기’라는 책 제목을 보고 구시대 추억거리에 불과할 것이라고 짐작했던 것과는 달리 추억에 실린 삶의 진면목을 되짚어보았다. 삶에 대한 의지를 새롭게 했다.
점점 대형화, 기계화, 자동화되어가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작은 구멍가게에 불과한 우리 자신의 삶일지라도 삶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엄숙함과 절박함을 일깨워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