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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신옥 Mar 29. 2021

인사 하나만이라도

~ 천사들의 인사 ~

 “안녕하세요? 빨리 오세요.” 

어떤 남자 초등학생이 아파트 현관 앞에서 인사를 하며 나를 향해 손짓하며 빨리 오라고 했다.  내 뒤에 누군가를 보고 하는 말인가 하며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는 것을 보니 분명 나에게 하는 인사였다. 


 ‘누군가?’ 기억을 더듬으며 걸었다. 우산과 시장바구니를 들고 있어서 뛸 수 없었다. 기다리던 아이가 마주 달려오며 장바구니를 함께 들자고 했다. 괜찮다고 사양하면서 

 “아줌마를 아니?”하자 지난번에 엘리베이터에서 만나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다 엘리베이터에서 초등학생들과 마주치면 직업병이 발동해서인지 무슨 말이라도 걸어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습관이 있는 터라, 사실 특별히 내 기억에는 없는 아이였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자, 아이는 내가 사는 층수도 기억해서 눌러주고 내가 물을 사이 없이 코로나로 인한 학교생활을 이야기 하기에 열을 올렸다. 

 기억해 주지 못해서 미안했고, 모른 척 그냥 지나치지 않아서 기특했다.      

 


 반가움이 가득한 아이의 얼굴을 대하니 나의 무표정한 얼굴에 미소가 살아나고 마음에 생기가 돌았다. 나이를 의식하지 못하고 금방 친해졌다. 인사를 잘한 상이라도 주고 싶었다. 장바구니 속에서 후식으로 먹으려고 샀던 감자 스낵 한 봉지를 아이에게 주었다. 아이는 놀란 눈으로 “와, 감사합니다!”라며 큰 선물을 받은 양 좋아했다. 


 일상의 작은 조각에 불과한 인사 하나에 마음이 맑아지고 삶의 무게가 가벼워진 듯했다.      

 


 집에 들어와서 일을 하면서  인사하던 아이의 잔상에 겹쳐서 세월 속에 묻혀 있던  고마운 실수가 떠올랐다. 기억의 저편 속을 걸으며 인사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대학생 때였다. 

며칠 후면 종강을 하고 여름방학으로 들어가는 시점이었다. 캠퍼스에 쏟아지는 여름 햇살을 피해 잠시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는데 저만치 앞에 과학과 교수님으로 보이는 분이 가고 계셨다. 그냥 모른척할까 하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다음 학기로 퇴직을 하신다는 말도 들었고 나는 휴학을 해야 할지도 모르기에,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연구실로 찾아가지는 못해도 만난 김에라도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나에게 인사한 아이처럼 숨을 헐떡이며 뛰어가서 인사를 드리자 교수님도 활짝 웃으며 반가워하셨다. 찜통더위 날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가 교수님이 뜻밖의 제안을 하셨다.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여름방학 동안 초등 교사들을 대상으로 과학 실험연수를 하시는데 실험조교가 필요하다고 하셨다. 많고 적음을 가릴 형편도 아니지만 아르바이트비도 꽤 많았다. 


 이게 웬 떡인가! 

갑자기 가슴에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지나가며 더위까지 싹 잊어버렸다. 하늘이 열리는 느낌이었다. 갈림길에서 몇 번이고 꾸벅꾸벅 감사 인사를 드리고 헤어졌다.      

 


 방학을 하자마자 실험연수가 시작되었다. 내가 하는 일은 교수님의 연수계획서를 보고 실험 재료 준비와 실험 세팅을 하고 일과가 끝나면 뒷정리를 하는 일이었다. 날아갈 듯 들떴던 마음과 달리 나는 첫날부터 헤매기 시작했다.      

 교수님이 넘겨주는 실험 지도안을 봐도 혼자서는 재료 구입도, 실험 준비도 불감당이었다. 자꾸 여쭤보기도 죄송해서 질문할 것을 최대한 모아서 여쭤볼 수밖에 없었다. 준비실에서 혼자 난감해하며 한숨을 쉬고 진땀을 흘리곤 했다.      

 


 더위와 일에 지치며 삼 일째 되는 날이었다. 교수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우리가 지난 학기에 다 해본 실험인데 왜 이렇게 어려워하는 것이냐고 했다. 나는 해 본 적이 없는 실험이라고 했다. 그제야 교수님은 자신이 뭔가 실수를 하신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음악 심화반인데 나를 과학 심화반 학생으로 착각하신 것이었다. 


 민주화 시위가 한창이던 80년대, 시위를 사전에 막기 위해 소그룹 담임교수제가 있던 시국이었다. 과는 달라도 담임교수로서 매주 1회 좌담회를 했는데 교수님은 나를 과학과 학생으로 착각하신 것 같았다. 내가 실험과정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바리 헤맨 이유를 그제야 납득하셨다.      


 

 아직 남은 기간이 너무 많으니 아르바이트를 그만 둘 각오를 했다. 하지만 교수님은 그럴 수는 없다고 하셨다. 이왕 시작했으니 끝까지 함께 해보자고 하셨다. 이후부터 교수님의 상세한 설명 덕분에 일이 점차 수월해졌다. 정확성이 요구되는 실험 준비는 교수님이 직접 하시기도 하셨다. 교수님은 사전 준비를 더 철저히 하게 되어 오히려 성공적인 실험연수였다고 하셨지만 나에겐 몸 둘 바 모르는 하루하루였다.   


 


 아르바이트가 끝나는 날, 교수님은 나를 격려하면서 교수님이 착각한 이유는 나의 인사 때문이었다고 하셨다. 만날 때마다 정중히 인사하는 모습 때문에 나를 자신의 과학과 학생으로 착각했고,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도 인사하던 모습이 떠올라 도중에 그만두게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아르바이트비를 받아서 돌아서 나오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한 인사를, 누구나 마주치면 의례적으로 하는 공허한 인사로 넘어가지 않고 마음으로 받아 기억까지 해주시다니, 수고비보다 더한 감동의 무게로 가슴이 묵직했다. 


 태어나서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나의 인사를 기억해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었다. 인사 하나도 진심으로 받아 기억해준 교수님 덕분에 휴학을 면했다.

 


 이제 나도 퇴직을 했고 나이가 들어 갈수록 할 수 있는 일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그래도 사는 날 동안 끝까지 잘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인사이다. 사소해 보이지만 내 마음을 쉽게 열어주고 오래도록 가슴에 머무는 것이 마음을 담은 인사였다. 


 

 인사하는 모습도 받는 모습도 사람마다 달랐다. 

그 아이처럼 잘하고 또 교수님처럼 잘 받아 줘야 하는 것이 인사라는 것을 나이 들수록 더 깊이 느낀다. 인사 하나만이라도 잘하고 잘 받아줄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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