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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현 Sep 29. 2020

조선의 고갱

이인성의 미술 읽기

사과나무, 1942, 캔버스에 유채, 91 × 116.5cm  Ⓒ 대구시립미술관

 미술가에게 어떤 수식어를 붙이면 기억이 잘 되긴 하지만, 역으로 그의 독창성을 침범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역동적인 자연의 모습을 표현하여 조선의 고갱이라고도 불리는 이인성은 근현대 미술의 포문을 연 미술가 중 하나이다. 당시 조선의 처지를 생각하면 이인성에게 고갱이라는 수식어가 퍽 화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인성은 고갱 못지않은 에너지를 그의 그림에 발산하는 미술가였다. 이인성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서양화의 개념 자체가 생소하던 시기 일본에서 그림을 배워와 귀국하여 꾸준한 전시와 수상을 통하여 작품을 선보였기에 그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이인성의 그림을 살펴보면 소재와 색상 그리고 구성 능력이 탁월하게 좋았다. 이인성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을 주로 그렸으나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조선 미술전람회 수상작인 <가을의 어느 날>의 상반신을 벗은 여인과 같이 다소 연출된 풍경을 그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그림 소재로 미루어 보아 이인성은 향토성을 강조한 미술가라고도 한다. 특히 이인성은 붉은 계열의 색상을 매우 잘 사용하였다. 그의 초기작에서 살펴볼 수 있는 황톳빛 풍경을 비롯하여 중기 이후에는 하늘 혹은 바다의 푸른색과 대비를 강조하여 더욱 강렬한 인상을 주고 있다. 또한 그의 그림에서는 구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역동성과, 사물의 표현에서 활용되는 곡선, 그리고 유화 작품에서 돋보이는 붓 터치에서 운동감이 느껴지는, 활력이 넘치는 필력이 그의 특징이다. 이인성은 꽃을 좋아해 집에 늘 꽃이 있었으며 자주 그리기도 하였는데,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카이유>에는 직선의 화병에 꽃을 표현한 곡선의 유려함이 리듬감을 형성하며 화면에서 뻗어나가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수채화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강렬한 붓 터치를 강조하고 있다. <사과나무>라는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탐스러운 사과와 나뭇가지들의 형상에서 생명력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이인성의 그림이 지니고 있는 조형적 힘이 지닌 충만함이 원시적 에너지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이는 그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소재들의 특징에 기인할 수도 있으나 그것 이상으로 그림에서는 힘이 느껴지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보아 이인성 그림의 특징을 향토성이라는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카이유, 1932, 종이에 수채, 72.5 ×53.5cm Ⓒ 국립현대미술관


관전 미술가라는 명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이인성은 아버지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화가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어려웠던 집안 사정으로 중학교 진학에 실패하였고, 대구 미술인 협회에서 수채화를 배워 16살에 세계 아동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특선을 받았다. 이러한 성과를 계기로 이인성은 수많은 미술 전람회에 지원하였고 수상을 하였다. 1929년 조선 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하며 그의 수상 기록은 시작되었다. 오늘날처럼 그림을 전시할만한 공간이 많지 않았고, 그의 미술 활동을 격려해 줄 집안의 후원 역시 전무하던 터라 각종 미술 대회의 수상은 그에게 사회적으로 미술가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유일한 길이었을 것이다. 그는 꾸준히 각종 한국과 일본의 전람회에 출품을 하여 수상을 하였으며 이는 그에게 관전 미술가 혹은 친일파와 같은 이름을 남기게 하기도 하였다. 이는 대회에 출품한 그의 그림의 소재가 여성, 꽃을 비롯하여 가난하고 원시적인 분위기로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일본은 한국에 대한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향토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한국은 가난하고 원시적인 국가라는 이미지를 통하여 그러한 정체성을 심어주고자 한 것이었다. 이인성은 대구에서 경북여자고등학교의 교장이었던 일본인의 도움으로 일본에서 그림을 배울 수 있었고, 일본에서는 오오사마 상회에 입사하여 작업실을 제공받았으며 일본의 전람회에서도 여러 차례 수상을 거듭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이러한 그의 이력과 이인성의 출중한 그림 실력은 당시 일본인들의 식민지 정책에 효과적으로 활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이런 그의 이력은 다소 비판적으로 읽히기도 하였다. 이인성에게 관전 미술가라는 타이틀을 부정할 수 없지만, 당시 그에게 미술가로서 그의 이력에 다수의 수상은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내, 외부적으로 큰 역할을 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이루어진 그림의 거래는 화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이인성은 해방 이후 이화여고와 이화여대에서 잠시 그림을 가르치기도 하였으나 38년의 짧은 생애를 살다 간 그의 대부분의 시간은 창작 활동에 전념하였다고 볼 수 있다.     

침실의 소녀, 연도미상, 캔버스에 유채, 80 ×44cm, Ⓒ 대구시립미술관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시대에 미술가로 살아가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집념을 가지고 전개한 미술가들의 활동들은 오늘날 한국 미술사를 기술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이인성 역시 그러한 미술가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그의 그림은 형태적인 소묘력과 과감한 색상 그리고 화면의 구성 능력까지 여러 가지 조형적 측면에서 훌륭한 그림을 그렸다. 1944년 조선미전에 출품한 <해당화>를 살펴보면 우선 2미터가 넘는 높이의 커다란 화폭에 가장 아래 부분의 흙과 풀의 묘사에서 여자아이들과 해당화 꽃 그리고 저 뒤의 동물들과 바다에서 하늘에 이르기까지 조화롭고 안정감 있는 화면 구성이 특징적이다. 또한 한 번의 수상이나 기회에 연연하지 않고 꾸준히 전람회에 출품하여 새로운 미술을 선보였다. 그리고 이인성은 향토성을 전략적으로 활용한 것만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고향과 한국의 전통 요소들은 진심으로 좋아하였다. 그의 딸 이름을 ‘애향’으로 지을 만큼 이인성의 고향에 대한 애착은 강하였다. 그의 자화상을 비롯한 초상화는 눈을 감고 있는 것들이 많다. 이것은 첫 번째 부인의 사망 후 그가 느낀 심리적인 괴로움의 표상이기도 하며 당시 괴로운 조국의 현실 때문에 이를 응시하지 못하고 눈을 감고 있는 인물들의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또한 인물을 표현함에 있어서 아름답고 예쁘게 묘사하기보다 그만의 느낌과 감정을 담아 표현하였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보아 이인성은 단순히 기교가 좋은, 새로운 문물을 배워 온 미술가에서 나아가 자신의 내면을 적극 그림으로 표현한 미술가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인성의 미술은 이러한 여러 이유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으며, 이러한 힘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2000년부터 이인성 미술상을 제정하여 회화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미술가들에게 상을 수여하고 있기도 하다. 2020년, 이인성 미술상의 20회를 맞이하여 대구미술관에서 현재 이인성의 미술을 직접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의 미술이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대중들에게 건재한 위상을 가지고 있는 이인성의 그림을 되짚어 보면 회화가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고찰하게 한다.    

해당화, 1944, 캔버스에 유채, 228.5 ×146cm, 개인 소장 Ⓒ 국립현대미술관
이인성 삼덕동 아뜰리에에서 Ⓒ 대구시립미술관


* 이 글은 월간 비자트와 중기 이코노미에 기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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